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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에 19년 선수생활의 종언을 고하다 ‘코리안 특집’ 박찬호, 야구 행정가로 제2의 인생 도전
결혼기념일에 19년 선수생활의 종언을 고하다 ‘코리안 특집’ 박찬호, 야구 행정가로 제2의 인생 도전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1.1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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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로서 동양인  최다승을 이루며 한국 야구계에 전설로 남은 박찬호가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은퇴식’에 모습을 드러낸 박찬호의 표정에서 진한 아쉬움과 깊은 슬픔이 엿보였다. 그간 꿈을 이루기 위해 수없이 올라야 했던 마운드와 그를 향한 환호성으로 성원했던 야구팬들 앞에 더 이상 선수로 설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 터. 은퇴식장에 들어서자마자 농담으로 애써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선수생활 시절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놓다 이내 숨겨왔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 번 쏟아진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19년 동안 메이저리그 진출에서부터 한국리그 복귀와 선수생활 은퇴에 이르기까지 동고동락했던 동료 선수들과 항상 같은 편에 서서 응원해줬던 야구팬들, 그리고 소중한 가족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듯, 그의 눈은 은퇴식이 끝날 때까지 뜨거운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대한민국 ‘1세대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한국 야구사, 그리고 세계 야구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장본인이기에 ‘선수생활 종언’의 의미는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날은 그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은퇴식을 이별을 말하는 슬픈 자리가 아닌, 그간의 노고를 축하하고 앞으로의 새로운 도전을 격려받는 자리로 만들고 싶었던 그의 속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동양인 메이저리거 최초 통산 124승 이룬 ‘전설’
충남 공주 태생의 박찬호는 공주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에서 프로선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1994년 한양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LA다저스에 입단하면서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실전에 투입된 지 17일 만에 마이너리그로 강등을 당하며 메이저리그 재입성을 위한 고독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마이너리그 ‘더블A팀’과 ‘트리플A팀’을 거치면서 그는 점차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의 효과적인 공략 노하우를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지 약 1년 5개월 만에 메이저리그 정원을 40명으로 늘려 마이너리그 유망주들에게 메이저리그 출전 기회를 부여함에 따라, 그 역시 메이저리그 재입성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던 때”를 떠올릴 만큼, 메이저리그 재입성은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했다.
“선수로 활동하면서 정말 기쁜 일들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 마이너에서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던 순간이 기억나네요. 이처럼 힘든 것들을 이겨냈기 때문에 당당히 한국인 메이저리거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이너에서 메이저리그 복귀는 사실 ‘하늘에 별 따기’와 비슷한 일이다. 그는 메이저리그 복귀를 위해 숙소에서 구장까지 10km가 넘는 거리를 뛰며 강한 정신력을 키워나간 것은 물론, 해발 1500m 고지대에서 강속구를 연습하며 조금씩 기본기와 정신력을 다져나갔다. 1996년 본격적인 시즌을 앞두고 열린 시범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함으로써 메이저리그 복귀가 마침내 이뤄졌다. 그 후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1승을 시작으로 선발 고정 등판, 통산 10승 달성, 팀 내 최고 성적 등을 연달아 달성했다. 그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그의 활약은 두드러지게 향상되기 시작했다. 1997년 14승, 1998년 15승, 1999년 13승, 2000년 한 시즌 최다승인 18승을 기록하며 국내 팬들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만든 ‘한국인 투수’로 기억되어 갔다. LA다저스에 소속되어 뛰는 마지막 시즌에서 그는 15승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생애 첫 올스타전 출전의 기회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현역 은퇴를 앞둔 칼 립켄 주니어에게 마지막 홈런을 맞았던 불명예스러운 기록 또한 갖고 있기도 하다. 2001년에는 텍사스와 5년간 6천500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켰지만 허리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자, ‘메이저리그 역대 최악의 먹튀’라는 혹평을 들어야만 했다.
“당시 ‘먹튀’라는 별명을 줬는데 선수로서 분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도 저와 가족들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줘서 고마운 면도 있죠.”
이후 샌디에이고와 뉴욕 메츠, LA다저스, 필라델피아, 뉴욕양키즈, 피츠버그를 끝으로 메이저리그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숱한 시련 속에도 당당히 현실에 맞서나가며 부침이 거듭 반복됐던 파란만장한 메이저리그 선수생활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피츠버그에 소속되어 메이저리그 마지막 시즌을 보낸 그는 구원승을 거두며 기존에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보유하고 있었던 동양인 최다승의 기록도 갈아치웠다. 이는 오랜 숙원을 이룬 것이어서 그에게도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메이저리그 통산 476경기에 등판해 124승 98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4.36, 탈삼진 1천 715개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011년에는 일본 리그에 진출해 선수로서 재도약을 시도했지만 1승 5패, 평균자책점 4.29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한국행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선택은 충남을 연고로 하는 한화 이글스였다. 구단은 박찬호에게 연봉6억원을 제시했지만, 그는 이 돈을 유소년 야구발전 기금으로 써달라며 기부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최저 수준인 2천400만원에 연봉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선수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시즌에서 그는 23경기에 출전, 5승 10패, 평균자책점 5.06을 기록해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한화를 통해 한국 무대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특별함은 남다른 듯했다.
“무엇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값진 1승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해요. 1승을 거둘 때 마다 국내 팬들의 성원에 보답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미국 유학 통해 ‘야구 행정가’로서 인생 2막 도전
그를 통해 은퇴 결정은 이미 1년 전부터 결심해왔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은퇴’를 떠올리고 있었던 셈. 하지만 자신이 계획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박찬호를 믿고 응원해준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무엇보다 컸다고 한다. 구단 관계자들조차 그의 은퇴를 만류했지만 앞으로의 비전이 뚜렷해지면서 은퇴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무대에 돌아왔을 때 1년 아니, 단 1개월이라도 기회가 된다면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행히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서 기회가 생긴 것이죠. 사실 처음부터 1년을 계획했지만 시간을 지내고 돌아보니 많은 아쉬움이 남았어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팀에 많은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스스로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를 찾기에 부족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올 시즌을 끝내고 단장님과 선수들이 내년에도 함께하자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런 고마운 마음들이 빠르게 은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1년 동안 제 나름의 목표를 충분히 이룬 것 같고, 한국 야구에서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이를 통해 앞으로 한국 야구에 제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계획을 어느 정도 세워 놓았고, 그러한 계획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은퇴를 결정할 수 있었어요.”
그는 은퇴식에서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도전’이라는 표현을 수차례 사용했다. 야구선수로서 현역에서는 은퇴하지만 야구 행정가로서 새로운 삶에 도전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은퇴 이후 미국으로 떠나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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