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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명문 조지아 공대 출신 김선호 전 코레일 유통 사장 부부 반찬가게 사장 되다.
최고 명문 조지아 공대 출신 김선호 전 코레일 유통 사장 부부 반찬가게 사장 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2.2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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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 그 시절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었잖아요. 지금은 밥은 먹고 살 수 있으니 그때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죠. 그러니 우리는 행운아입니다. 이 시대 베이비부머 세대들 모두 힘내세요.”

한때는 코레일 유통 사장이었다. 고위 공무원 생활도 했고, 비서에 운전기사까지 붙는 최고의 대우도 받아 봤다. 그런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회사에서 잘리고 갈 곳을 잃었다. 나갈 돈은 산더미인데 들어오는 돈은 땡전 한 푼 없었다. 그만 믿고 있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아내와 아직 마쳐야 할 공부가 쌓여 있는 자식들. 한숨만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체면도 스타일도 다 버렸다. 그러니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스물다섯 살, 파릇파릇했던 그때처럼.

반찬가게 사장님과 사장님 남편
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군침을 돌게 한다. 분주히 움직이는 부부의 모습이 정답다. 남편 김선호 씨는 열에 맞춰 의자를 정리하고, 아내 이성숙 사장은 조물조물 음식을 장만한다. “어서오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그들은 사실 2년 전까지만 해도 반찬가게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히려 ‘내가 반찬가게를 왜 해’라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안이 없었어요. 퇴직하면 폼 잡고 유명한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것을 모두 꿈꾸잖아요. 그런데 최소 5억~6억원은 있어야 하죠. 우리 세대에게 그만한 돈이 어디 있어요. 어쩔 수 없었죠. 아내가 제안하기에 많은 고민 끝에 그럼 한번 해보자고 했죠.”
아내 또한 처음에는 남편과 같은 생각이었다. ‘반찬가게 할 생각 없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내가 왜’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하지만 무언가는 해야 했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반찬가게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죠.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늘 반찬을 만지는 주부니깐 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반찬가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알아보니 다른 사업보다 돈도 그다지 많이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서울대를 졸업해 미국 유학도 다녀왔고, 경영학 박사까지 수료했으면서 ‘겨우 한다는 게 아내 반찬 만들게 하는 것이냐’라는 시선은 자꾸만 그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제일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반찬가게를 하기까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향해 고향에서는 ‘개천에서 용났다’고 했다. 코레일 유통 사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하고, 민간 기업 사장도 했다. 고급세단과 기사, 비서실장까지 있었다. 대학교수도 해봤다. 하지만 세월의 힘 앞에는 잘나가던 그도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인재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었고, 그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틈을 타 부부의 꿈이었던 낭만 여행을 다녀오자며 길을 나섰다. 하지만 모아놓은 돈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잠시 즐긴 일탈의 끝은 끝없는 적자였다. 수입은 5분의 1로 줄었는데 지출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결국 정신력마저 무너졌다. 그렇게 어느 날 무작정 차를 몰고 달려가니 광진교 위에 서 있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꿈도 희망도 남은 것이 없었죠. 결국 지금 죽는 것이 최선이라고 마음먹었어요. 이상할 정도로 넓고 깊고 고요해  보이던 한강은 세상의 모든 소리도 삼켜버릴 것 같았죠.”
하지만 자살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광진교 위에 올라서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니 죽음이 두렵기도 하거니와 남겨진 처와 자식들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의 온실 속에서 지내던 가족들의 앞날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한동안 그의 정신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가 “반찬가게를 열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활짝 웃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처음 아내가 돈을 벌겠다고 했을 때 ‘그러다 제풀에 지치겠지’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경제 활동을 해본 적이 없는 아내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반찬가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그제야 아내의 결심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부터 아내와 함께 시장조사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야 들어왔죠. 항상 함께 다녔어요. 운전기사 노릇도 제대로 하고요.”
그토록 애타게 찾은 결과 지금의 장소에 반찬가게를 열었다. 젊은 세대가 많아 반찬 장사에 제격이었고, 반찬은 경기에 민감하지도 않은 아이템이었다. 장사는 의외로 잘됐다. 점차 손님이 늘어가더니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내의 반찬가게를 처음부터 지켜본 그는, 경영학 교수인 본인보다 아내가 경영을 더 잘한다고 말한다.
“아내는 솔직한 경영을 해요. 조미료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쌀, 고기 모두 국내산만 사용합니다. 집에서는 독일서 수입한 삼겹살을 구워먹는데 말이죠. 그런 마음을 손님들도 다 아는 것 같아요.”
그의 말처럼 아내의 경영 방법은 통했다. 요즘 반찬가게는 연 1억원의 매상을 올리는 등 승승장구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처음 내키지 않아했던 그도 반찬가게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셔터맨 노릇을 자청하고 있다.
“아내가 가게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서포트를 확실하게 했죠. 아침에 문 열고, 바닥 쓸고 닦는 것부터 식자재 나르고 저녁에 정리하는 것까지 저도 엄청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 남편이 있어 아내는 참 든든하다. 과거에는 남편이 좀 늦게 들어온다고 연락 오면 ‘잘됐다’를 외쳤는데 요즘은 시간되어 오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부부싸움 할 일도 없어졌다.
“대부분의 부부들이 관계가 맹숭맹숭해요. 그런데 이제 서로가 이해를 하니깐 더 잘하게 되고 애틋해요. 회춘하는 느낌도 들고요. 하여튼 아내가 항상 사랑스러워요.”

다시 한 번 주어진 인생
부부의 성공 스토리는 이미 지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남편이 책까지 펴냈으니 이제는 전국구로 유명세를 탈 것 같다. 반찬가게를 열고 달라진 것은 경제 사정과 부부 사이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아내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아내가 일을 하고 나서 부터는 얼굴이 밝아졌어요. 늘 희망을 가지고요.”
그런 좋은 결과 덕일까. 처음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린 이들도 요즘에는 만나기만 하면 ‘비결’을 물어본다.
“지금은 다 부러워해요. 물론 여전히 반찬가게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기업 사장하던 친구도 부러워하죠.”
그도 그럴 것이 베이비부머 세대들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지금은 모두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회사에서 높은 직급에 있다가 그만 두는 순간 바로 수입이 전무해지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빨리 힘든 과정을 겪었던 그이기에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평균 수명이 85세라고 하니 55세에 회사를 그만 둔다고 치면 앞으로 30년이 남은 거죠. 30년 동안 살아갈 수가 없어요. 재산이 3억4천만원인 사람은 2억9천만원이 집이고 남은 5천만원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계산해 보니 한 달에 15만원 밖에사용할 수 없더라고요.”
사회적 문제인 동시에 개인이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늘 물에 담가 벌게진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힘들겠지만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도 희망은 있으니 힘내라고 그는 말한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평균 수명이 85세가 되었어요. 제가 태어난 1955년에는 평균 수명이 52세였거든요. 그때에 비하면 33년을 더 살아요. 그러니깐 제가 25살이었을 때나 지금 58살인 제 나이나 똑같은 거예요. 25살. 그 시절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었잖아요. 지금은 밥은 먹고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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