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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찾은 부정(父情) 박재동 화백 ‘나의 아버지를 그리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찾은 부정(父情) 박재동 화백 ‘나의 아버지를 그리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6.1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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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활동들을 줄이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될 시기라고 봐요. 결국 독자들은 저에게 훌륭한 작품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폐결핵으로 교편을 놓아야 했던 그의 아버지는 연탄배달, 풀빵장사, 팥빙수 장사 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투병생활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 삶의 여유가 없었을 시기임에도 그의 부친은 1971년부터 유명을 달리하기 직전인 1989년 5월 27일까지 20년 가까이 일기를 썼다. 그 기록들이 고스란히 남아 어느덧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중년의 나이가 된 박재동 화백의 손에 쥐어졌다. 박 화백은 가족을 묵묵히 이끌며 애써 뒷모습만 보이려 했던 아버지의 애틋한 부정을, 오랜 세월의 흔적처럼 남아 있는 일기장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진심을 헤아린 아들의 ‘아버지 전 상서’
박 화백이 기억하는 어렸을 적 아버지는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쉽게 쓰는 호칭인 ‘아빠’라는 말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던 시절, 그는 아버지에게 어리광 한 번 부려 보지 못하고 아버지를 어렵고 무서운 존재로만 여겨야 했다. 먹고 살기에도 벅차던 한국전쟁 이후, 가족의 생계와 동시에 집안 어른들을 봉양해야 했던 아버지가 처자식을 챙기며 다정다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그 자체로 어렵고 무서운 분이셨어요. 그도 그럴 것이 유년 시절에는 전쟁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했고, 전통의 가치관을 고수하는 사고방식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처자식을 챙기면 소위 ‘못난 사람’처럼 바라보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부자 관계가 그다지 매끄럽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것 같아요. 그래서 같은 집에서 살고는 있지만, 아버지와 속 깊은 이야기는커녕 많은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죠.”
때문에 아버지의 소천 후 접한 아버지의 일기장은 그에게 아버지를 이해하는 새로운 통로가 되었다. 20년 세월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일기장의 행간을 놓치지 않으며 읽어 나가던 그는 문득 아버지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내 그의 마음속에는 이전까지 접할 수 없었던 친근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일기장을 보면서 과거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비로소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친한 친구가 쓴 글을 보면 그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항상 만나도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진짜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런 느낌이 든 거죠. 아버지는 늘 큰 나무나 집처럼 그 자리에 계시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멀리서 자식들 뒷바라지에만 몰두하셨는데, 일기장에는 매상 걱정에 자식들 걱정까지 써 놓으신 것을 보니까 아들로서 참 마음이 아팠어요. 저는 어려움 속에서도 만화방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워주신 아버지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 공부도 할 수 있었고, 현재 대학 교수로도 활동하며 안정되게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최근 그가 엮어낸 신간 <아버지의 일기장>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의 합작품이다. 아버지의 일기를 본 아들은 그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고, 그것에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담아 그 당시의 기록을 적었다.
“한 언론사를 통해 아버지의 일기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우연히 그 글을 본 출판사 관계자가 책 출간을 먼저 제안해서 <아버지의 일기장>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어요. 물론 지금의 시대상과 맞지 않을 수도 있는 옛날 아버지들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생각해요. 이 시대를 사는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득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박 화백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일기를 쓰고 있을까.
“저 역시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와서 아직도 그 당시 쓴 일기장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러다 한동안 안 썼는데 2000년대 들어서 띄엄띄엄하지만 중요한 기록들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일기장을 펼치곤 하죠. 일기를 쓰면 삶이 그냥 흘러가 버리지 않고 정리되고 쌓이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삶이 더 소중해지는 느낌도 들고, 지쳐 있는 자신을 어루만지는 위안의 시간이 될 수도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자녀교육의 핵심 원칙은 ‘부자유친(父子有親)’
박 화백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그가 지닌 자녀교육의 모토는 아이들과 친구처럼 격의 없이 지내는 것이다. 어린 시절 그가 경험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그만의 방식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훈계가 해답이 아니었다. 자녀와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정보화 사회, 대가족에서 핵가족을 이룬 시대적 상황에 따라 아버지의 역할에도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 그다.
“농경사회에서는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짓는 가정이 하나의 가족 기업이었기 때문에 농사 노하우를 가장 많이 가진 아버지가 저절로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일터와 학교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에 변화가 따를 수밖에 없는 거죠. 특히 요즘에는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니 자녀가 저보다 알고 있는 정보들이 많은 데다, 개인적으로 제가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훌륭한 인품은 아닌 듯해서 자녀와 친구처럼 지내는 게 편한 것 같아요.”
이 같은 노력으로 그는 자녀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학교생활이나 친구관계에서부터 장래희망이나 철학적인 고민에 이르기까지 그는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소중한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있다. 이는 과거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교육현장에서 깨우친 교육 노하우 등을 자녀 교육에 효과적으로 적용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자녀에게 부모가 원하는 결과를 요구하는 일방적인 훈계가 아닌, 인생의 동료로서 자녀를 믿고 지켜보는 ‘신뢰관계의 소통’이 전제되어야 부모와 자녀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는 자녀를 대할 때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편이에요. 친구가 되면 근엄한 아버지가 들을 수 없는 자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죠. 저희 아이들은 철학에 관심이 많은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예요. 기본적으로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를 떠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료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결국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자연스럽게 존중의 의미가 형성되고, 그러면 아이들은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하고 준비하는 개척자가 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자녀를 향한 걱정은 오히려 아이들의 뜻을 존중하지 않고, 나아가 인격을 모독하는 처사라고 봐요.”
한편, 현재 딸은 아내이자 배우인 김선화 씨의 영향을 받아 연기지망생으로 얼마전 영화 <26년>에 출연한 바 있으며, 아들은 시사만화가인 박 화백과 마찬가지로 만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다.

그간 잠시 ‘외도’했지만 다시 작품 내놓고파
딱딱한 시사만화가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는 후학 양성은 물론, 창의적인 문화·예술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과거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가르쳤던 느낌과는 다른 소회를 갖게 된다”고 언급했다.
“고등학교 과정은 전문가를 양성하기보다 누구나 그림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예술적 감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 데 반해, 대학생들은 머지않아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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