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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특유의 끈기로 ‘소통의 리더’ 꿈꾸다.
KBS 첫 여성 부사장 시대 연 류현순 부사장
여성 특유의 끈기로 ‘소통의 리더’ 꿈꾸다.
KBS 첫 여성 부사장 시대 연 류현순 부사장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7.1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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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기보다는 바이스(vice)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여성으로서 구석구석 아우르는 소통 능력을 살려나가겠다”


수년간을 잡지 에디터로 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생긴 버릇 하나가 있다. 그것은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을 ‘이미지화’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인터뷰 글을 읽는 독자를 현혹시키기 위한 나름의 꼼수이기도 했고, 편집자로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는 동안의 소희와 분해된 인터뷰이들의 얼굴을 모니터 앞에서 재조립하다 보면, 그 이미지에 매몰돼 실체와는 거리가 먼 ‘구름 같은 인터뷰를 했구나’하는 자학이 들 때도 있었다. 류현순 KBS 신임 부사장을 만나러 갈 때도 그랬다. 그이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잔다르크와 같은 기세고 당찬 ‘여장부’ 이미지였다. 고백컨대 그이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이를 이런 이미지로 몰아가려 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그이를 만나면서 완전히 허물어졌다. 이제까지의 관성적 습관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어머니 리더십’
그이는 생각보다 포근하고 자상한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말투하며 표정은 잔다르크와 같은 여전사라기보다 어머니의 느낌이었다.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는 방송국이라는 조직에서 이처럼 부드러운 성향의 사람이 부사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긴 하지만 책임감도 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에요. 부사장은 사장의 철학을 충실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돕고, 위아래와 소통하는 자리라 생각해요. 리더라기보다는 바이스(vice)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여성으로서 구석구석 아우르는 소통 능력을 살려 길환영 사장의 배가 잘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그이는 1977년 9월 TBC에 기자로 입사하며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1980년 KBS에 입사해 1992년 제주방송총국 보도국 편집부장, 1999년 보도국 과학부장, 2002년 수원센터 부주간, 2007년 제주방송총국장을 거쳐 지난해 12월부터 정책기획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5월, 그이는 방송부문 부사장으로 임명돼 경영부문을 맡고 있는 전홍구 부사장과 함께 길환영 사장을 보필해 방송국을 관리해 나가게 되었다. 30여 년 기자생활을 해온 보도국 출신이지만 경계를 허물며 여러 직책을 거친 그이에 대하여 KBS 사내를 포함한 언론계의 기대가 크다. 이번 인사에 소위 “될 사람이 됐다”는 반응부터 “보편적인 색채의 인물”이라는 평까지 나온다.
“여러 이념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끈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확실하게 자기를 보호해 주는 틀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저는 그럴 힘이 없다 보니 발령받은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계보, 계파, 사조직에 관련이 될 수도 없었고, 될 필요도 없었어요.”
그이는 “나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시대의 변화”가 자신을 “그 자리에 앉혔다”고 말했다.
“방송사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후배들로부터 따뜻한 축하를 많이 받는 걸 보면 제가 그렇게 잘못 산 것 같지는 않아요(웃음).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던 데는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박근혜 대통령이 유리천장을 뚫고 나오니 여성들의 도약이 한결 수월해진 것 같아요. 앞으로 능력 있는 후배들이 많은 자리에 진출할 수 있도록 보살피려 합니다. KBS 내에서 여성인력의 임신과 출산 등에 따른 업무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많아요. 방송담당 부사장이지만 이런 문제와 관련해 합리적인 출구를 마련하려 해요. 여성 부사장의 몫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이의 가장 큰 경쟁력은 ‘여성성’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몇몇 여성들은 남성 위주의 조직에서 남성화되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질감으로 인해 도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이는 자신의 고유한 성향을 최대한 부각시켜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남성들은 미처 생각지 못한 곳을 챙기면서 자신을 알려갔다. ‘best one’이라기보다는 ‘only one’ 전략에 가까웠다.

워킹맘 그리고 열혈 기자로서의 삶
그이는 30년간 열혈기자로 활동해왔다. 그동안 해왔던 수많은 취재 중에 1990년대 쓰레기 분리배출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했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이는 이 취재로 ‘쓰레기 기자’라는 별명이 붙었고, 1999년에는 ‘최은희 여기자상’을 수상했다.
“기자로서 가장 활발히 뛴 때는 1990년대라고 기억해요. 당시 환경문제와 관련된 쓰레기 분리배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죠.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집 안 쓰레기를 밖에 나가 분리해 버린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참 생소한 개념이어서 반발도 꽤 있었어요. 그래서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의 쓰레기 분리배출을 취재하는 등 대국민 홍보 취재를 많이 했어요.”
당시 박성범 전 의원이 보도본부장이었는데, 쓰레기 관련 취재를 특집에 그치지 말고 9시 뉴스에 연속 기획 보도하라고 할 정도였다. 쓰레기 관련 토론회에 단골로 불려 다녔고, 청소부 아저씨들로부터도 숱한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 후엔 도심 지하공간 활용 문제, 총기 규제 등의 이슈를 다루기도 했다.
“기자 경험을 통해 정직이 최선임을 체감해 왔어요. 말이나 일이 한 번 꼬이면 바로잡기가 힘들죠. 한두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들인데, 정직하게 이미지를 관리하지 않으면 좋은 소리 듣기 힘들어요. 그 다음은 진심입니다. 기자 생활 중 들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현재의 상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에요. 특히 여성은 학맥이든 인맥이든 줄타기하기가 참 힘들어요. 과거에 한 부서에서 따돌림 받던 상사를 성실히 보좌한 적이 있는데, 그분이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자리에 올랐을 때 저를 챙기더라고요.”
이처럼 ‘당시의 보스에 충실한 삶’이 ‘최초의 타이틀’을 맞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성공한 여성으로 꼽히지만 그이에게도 어려운 시절은 있었다. 언론계에 입문할 당시 기자라는 조직에서 여기자는 주연이기보다는 조연에 가까웠고, 성과에 대한 기대치도 높지 않았다.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매 순간 힘들 때마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넘기고 보자고 생각했어요. 너무 멀리 생각하면 지칠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내가 지금 밀리면 내 후배들은 더 높은 장벽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기도 했어요.”
특히 결혼 후 두 아들을 둔 워킹맘으로의 갈등은 그이도 빗겨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일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됐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최은희 여기자상 수상 소감이 ‘아이들이 내몰아 이 상을 받게 됐다’는 것이었어요(웃음). 당시 IMF 위기 여파로 방송국에서도 명퇴 신청을 받아 아이들에게 물어봤죠. ‘엄마가 이 기회에 명퇴하고 너희들과 함께 있을까’하고요. 그런데 당시 중·고등학생이었던 두 놈이 모두 쌍수를 들어 반대하더라고요. 엄마가 집에 있으면 안 하던 잔소리를 할 텐데 어떻게 견디겠느냐며 계속 일하라고 떠밀었어요(웃음). 1996년 1년간 포틀랜드주립대에 연수할 기회가 있어 온 가족이 갔는데, 거기서 아이들이 의식주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는 독립심을 기르게 된 것 같아요. 일본 공대에 다니는 둘째는 요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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