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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 울렸던 그때 그 방송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진행 이지연 아나운서
온 국민 울렸던 그때 그 방송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진행 이지연 아나운서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9.06 10: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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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부나
그리웠던 삼십 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 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내일일까 모레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삼십 년 세월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 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

 

“60년이 지난 지금, 뜨거웠던 감동과 눈물을 우리는 깊이 기억하고 또 깊이 새겨야 할 것이에요. 가족이 무엇인지, 핏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그래서 더욱 귀중하고 소중한 프로그램이었어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패티 김의 노래를 시작으로 생방송이 시작됐다. 150명의 이산가족이 스튜디오를 들어서자마자 KBS 사무국의 전화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밤 11시까지 1천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여의도 KBS 광장으로 찾아왔다. 소통이 어려웠던 그 시절 이산가족들에게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얼마지 않아 KBS 건물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자보가 덕지덕지 붙었다. 혹시나 소식이 들려올까 몇 날 며칠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1퍼센트의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다는 염원이 가득했다. 혹시나 연락이 온 사람은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대성통곡을 했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자리에서 실신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오빠”, “어머니”, “딸아” 40년 가까운 세월을 혈육의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아야 했던 혈육을 다시 만난 벅찬 반가움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모진 지난 세월들이 한데 뒤엉켰다. 두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그 세월을 씻어내듯 멈추지 않았다. 1983년 6월 30일을 시작으로 138일간 여의도 KBS 청사 주변과 당시 여의도광장이 위치한 곳까지 눈물바다가 이뤄졌다. 그리고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닌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벽보는 비에 젖고 사연은 눈물에 젖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부터 먼저 나요. 이 높은 KBS 건물에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서 저 꼭대기에까지 벽보를 붙였어요. 바닥에 작은 공간이라도 생기면 종이쪼가리를 붙여 어떻게 한번이라도 카메라에 비춰지길 간절히 바랐던 거죠.”
직접 장소를 설명하겠다고 KBS를 한 바퀴 돌던 이지연 아나운서의 눈시울이 불거졌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진행했던 어떤 아나운서보다도 최고의 진행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이다. 목소리가 좋고 말을 잘했다는 것보다 그이의 진행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루 종일 서서 방송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이의 손을 잡고 있기만 해도 위안이 된다는 이산가족들의 말에 일일이 손을 잡아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밤잠도 제대로 못 자는 나날이 몇 달 동안 계속됐지만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이산가족에게 먼저 품을 내줬다.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면 누구나 그렇게 했을 거예요. 이산의 아픔, 만남의 감동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그이의 말처럼 1983년 여의도는 한여름 더위도 무색했다. 지금은 공원이 됐지만, 30년 전에는 허허벌판 광장이었던 그 넓은 곳이 벽보로 도배가 됐다. 혹시나 젖지는 않을까 비닐을 씌우고, 바람에 날아가지는 않을까 테이프로 붙였다. 정말로 발 디딜 틈 없이 광장이 가득 찼다. 30년 전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KBS 청사의 한곳에는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바람으로 만남의 동상을 건립했다.
138일에 걸쳐 장장 454시간 45분 동안 계속됐던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국은 물론 전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기획되었던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당시 지금의 <아침마당> 전신인 <스튜디오 830>이라는 아침 프로그램에서 6.25 전쟁 33주년 특집방송을 기획했고, 그중 하나가 ‘아직도 내 가족을 못 찾았소’였다. 그런데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전화통에 불이 났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방송국으로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뜻밖의 반향에 방송이 끝나고 나서 바로 긴급 편성을 하게 됐고, 특별 생방송으로 3시간 진행을 계획했다. 
“그때가 1983년 6월 30일이었어요. 딱 30년 전이죠. 그 당시에는 특별 생방송이라는 것이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어요. 더욱이 1980년대의 방송 환경 상 3시간 연속 생방송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그런데 3시간 만에 끝낼 수가 없었어요. 밤 10시에 방송을 시작했는데 그 늦은 시각에 방송국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온 거예요.”
30분 만에 첫 상봉 가족이 나오고 기적처럼 그날만 서른여섯 가족이 만났다. 결국 기존의 계획이었던 3시간에서 1시간 30분을 훌쩍 넘긴 4시간 30분 동안 방송한 후에야 끝이 났다. 그 다음 방송은 4시간을 편성했는데 방송 도중 6시간으로 늘어났고, 그 다음에는 8시간, 나중에 제일 길게는 16시간 35분간 생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1천여 명의 스텝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시간
생방송으로 진행되니 모든 스텝이 24시간 스탠바이하며 동고동락했다. 그이 또한 집 대신 방송국 주변에 숙소를 마련해 최대한 시간을 아꼈다. 당시 프로그램에 투입된 KBS 직원만 1천여 명이었다. 유철종 박사와 메인 MC를 진행했던 이지연 아나운서는 늘 무대 한쪽에서 대기를 했다. 언제 가족 상봉이 이루어질지 모르니 ‘상봉하러 온다’는 큐 사인이 오면 현장으로 바로 뛰어나가 진행했다. 프로그램의 좋은 취지와 대규모 기획이라는 점에 국내외 방송국을 비롯한 언론사들의 주요 취재 장소가 됐다. 영화 촬영을 하겠다는 곳까지 생겼다.
“문제는 취재진이 너무 많이 몰리니까 상봉 가족에게까지 헤치고 갈 수가 없어 마이크를 댈 수가 없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야 하는데 아주 난감했죠.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카메라맨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가서 마이크를 대 드렸어요. 그동안 저는 그걸 잊고 살았는데 한 특집방송에서 당시 함께 진행했던 유철종 선생님이 그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1980년대 보수적이던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이의 행동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늘 품위를 지켜야하는 아나운서였다. 그러니 이 아나운서의 투철한 프로정신이 빛났던 그날의 에피소드는 두고두고 아나운서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잠을 제대로 자는 것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김밥이 주된 메뉴였다.
“뒤로 살짝 빠져서 쏙 먹고 다시 돌아와서 진행하는 게 가능했거든요. 그래서 늘 김밥으로 허기를 달랬어요. 졸기도 정말 많이 졸았어요. 그러다 졸음을 참기 힘들 때는 극단의 방법으로 목뒤에 화끈한 로션까지 바르고 진행했죠. 그럼 눈이 번쩍 뜨이거든요.”
광고 방송이 없었느니 쉬는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릴레이 방송이 이어지자 대부분 한 번씩은 링거 투혼을 해봤을 정도였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것이니 KBS 방송국의 모든 피디가 차례를 만들어 줄을 섰고, 아나운서 또한 이지연, 유철종 메인 아나운서뿐 아니라 KBS 전 아나운서 모두 언제나 스탠바이 상태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시청률 78%라는 경이로운 순간도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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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18-09-19 17:09:37
저는 그때 돌바기 아기였는데 어르신들이 그러시는데 그때 온 대한민국이 울었다고 할정도이니 짐작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