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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코리아로 흥(興)하라 이노디자인 김영세 대표의 ‘Creative Life’
디자인 코리아로 흥(興)하라 이노디자인 김영세 대표의 ‘Creative Life’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9.06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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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모든 소유하는 것들이 소멸되어 간다.
우리는 두려워할까? 최선을 다할까?

김영세
그이라면 순간 이동 생각?생각?생각?

이웃들 친구들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
김영세의 자존심!

김영세
고운 향기를 지닌 퍼플 피플!
천천히 빨리빨리 느리게 순간 포착
뜨거운 열정으로 사랑을 빚다.

김영세
함께 떠나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 꿈틀대는 것들
지금 그의 끊임없는 열정은 힘차게 도전하며 
0.1초의 순간마다 뻗고 오르고 비상한다.

김영세 0.1초의 승부
사랑과 평화

김영세
만나면 반가운 사람.
만나면 친구가 되는 사람.
만나면 행복을 주는 사람.
 
2013. 7. 20.
변호사 靑波 이재만


척박한 환경에서 산업디자인의 비전을 보다
불과 1970년대만 해도 국내 산업디자인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산업디자인이라는 단어조차 쉽게 통용되지 않았을 시절, 김영세 대표는 운명적으로 산업 디자인 분야에 흥미를 느꼈다. ‘단순히 좋아서 하고 싶었던 일’이었지만 그것이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이다. 산업디자인을 향한 호기심 어린 열정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재만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산업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영세 경제적으로 넉넉한 친구 집에서 당구를 치다가 지루해서 우연히 위층에 있는 친구의 형 서재에 들어가서 책을 보게 되었어요. 많은 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뽑아 들어서 펼쳐 보니 그 속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었죠. 그 책이 바로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라는 잡지였어요. 산업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당시 처음 알게 되었죠. 그때 딱 결심을 했어요.
‘이게 나의 직업이다’라고 말이죠. 그게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네요.
이재만 당시에는 산업디자인에 대한 개념 자체가 생소할 때였을 것 같은데, 어떻게 산업디자인에 대한 비전과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나요?
김영세 산업디자이너의 꿈을 갖는 순간 확신이 생겼던 것 같아요.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매우 가슴 벅차올랐거든요. 중학교 시절 한창 방황하고 아무 것도 몰랐을 때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거죠. 단순히 노는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면서, 또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어요. 그렇게 ‘이건 나의 꿈이고 미래다’라고 결심했죠. 당시 국내 산업디자인 분야가 불모지나 다름없어서 유학의 꿈을 가지고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나서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는데 마침 공업디자인과가 생기더라고요. 대학 졸업 후 바로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죠.
이재만 미국 유학시절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요, 당시 미국의 앞선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은사님을 꼽아 본다면.
김영세 그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업디자이너였던 빅터 파파넥 교수님을 잊을 수 없죠. 당시 캔자스시티미술학교 교수님이셨는데, 제가 다니고 있었던 일리노이대에 특강을 오신다는 포스터를 보고 한 달 전부터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죠. 특강 당일에 맨 앞줄에 앉아서는 강의를 들었어요. 그날 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교수님들만 참석할 수 있는 리셉션 장소에 직접 찾아가게 됐어요. 학생 신분으로 몰래 들어가서 교수님이 앉으실 자리의 바로 옆자리에 슬쩍 앉아 있었죠. 예상대로 파파넥 교수님께서 바로 제 옆자리에 앉으셨고, 유학 초기라 부족한 영어 실력이었지만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제 소개를 하고 두 가지를 부탁 드렸어요. 하나는 교수님의 저서인 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번역을 하고 싶으니 저에게 번역권을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수님의 학교에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갈 테니 한 한기만 지도교수님이 되어달라는 것이었죠. 다행스럽게도 두 가지 부탁을 모두 그 자리에서 승낙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6개월 동안 20시간이 넘는 거리를 밤을 새워 이동해서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죠. 나중에는 교수님께서 집에서 잘 수 있는 방도 내어주시고,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시기도 했어요. 그렇게 오가면서 교수님 책을 몇 년에 걸쳐 번역도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교수님께 ‘죄송하지만, 제 책을 쓰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파파넥 교수님의 많은 영향을 받아 탄생한 저의 첫 책이 바로 <12억짜리 종이 한 장>입니다.
이재만 당시 그 책의 반응은 어땠나요? 국내에는 그런 종류의 책이 거의 없었을 텐데요.
김영세 책이 굉장히 히트를 쳤죠. 그때만 해도 그 책이 디자인 이야기를 가장 깊이 있게 전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당시 국내에도 디자인과 관련된 번역본은 많았지만 디자이너 본인의 생각을 쓴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돌이켜보니 책 맨 뒷장을 보면 39가지 디자인 패러다임이 적혀 있어요. 제가 지향하는 디자인의 핵심 가치를 담은 짧은 글이었는데,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Design is Loving Others’라는 개념이 이 책에서 처음으로 나온 거죠.
이재만 그 말이 탄생한 일화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이야기인가요?
김영세 ‘Design is Loving Others’는 12년 전 아들이 만든 쿠폰에서 비롯된 말이에요. 당시 아들이 Mother’s Day(어머니의 날)에 엄마를 위해서 차 닦아주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등의 쿠폰집을 선물로 줬는데 다 일정 유효 기간이 있었어요. 그러다 쿠폰집의 마지막 장을 보니 ‘사랑하기’하고 만기 없음이라고 써놓은 거예요. 그것을 보고 아내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죠.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최고의 디자인은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탄생한 말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듯이 디자인하라는 의미의 ‘Design is Loving Others’이죠. 현재 제가 운영 중인 이노디자인의 모토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이재만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인 기업인 이노디자인은 어떻게 설립하게 되셨습니까?
김영세 미국 유학 시절 꿈은 ‘여기서 디자인을 잘 배워 한국에 디자인의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이었어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창업을 계획했던 셈이죠. 당시 인생 목표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제 회사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이미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이노(INNO)를 따서 만든 ‘이노’라는 브랜드를 간직하고 있었고, 디자인 회사에 취직해서도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저만의 브랜드 로고를 디자인하기도 했죠. 저는 이노라는 단어에서 네모, 세모, 동그라미를 발견했고, 일부러 염두에 두진 않았지만 나중에 보니 ‘천지인’ 개념과도 일치했죠. 그렇게 이노디자인 로고까지 디자인해서 수첩에 넣고 다녔어요. 일종의 미신처럼 항상 지니고 있다가 결국은 창업할 때 그 상표를 등록할 수 있었죠.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노’라는 상표가 3천 개가 넘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모방하는 브랜드가 되어서 오리지널리티를 인정해주지 않는 한국 사회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진·선·미’의 디자인 원칙을 담은 혁신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단순히 화려하게 외관을 꾸미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 배려가 디자인에 깃들 때 비로소 하나의 디자인 혁신이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관심은 세상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는 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얻을 때 항상 대의적인 원칙을 세우고 나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창의적인 해답을 찾아나간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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