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야망을 그리다 <여왕의 꽃>

악녀 이야기

2015-06-05     이윤지 기자

지독하고 집요한, 뜨거운 그 무엇. ‘야망’이라는 말은 알 수 없는 온도를 지녔다. 불타는 듯 뜨겁게 느껴지다가도 그 시작은 아주 서늘하고 을씨년스러운 바닥에서부터였을 것 같다. 앳된 소년들을 위한 구호이기도 한 이 말은 그 대상이 다를 때 또 다시 새로워진다. <여왕의 꽃>은 딸을 버리고 성공을 좇는 한 여자의 야망을 다루고 있다.

여기,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거머쥐기로 결심한 한 여자가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생의 바닥을 미리 겪은 이 여자는 타인을 짓누르고서라도 사회적 명성과 부를 가지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강렬한 집념으로 여자는 더욱 단단하게 다듬어지고 성공은 머지않아 보인다. 아무렴, 여자는 친딸조차 버린 채 숨 가쁘게 살아왔다. 딸을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새로운 국면이 이 드라마의 본론이다.
“지옥에 떨어져도 좋아. 갖고 싶은 건 다 갖고 말겠어. 무슨 짓을 해서든!”
섬뜩해지는 주인공 레나 정의 말을 여러 번 읽어본다. 아마도 지옥을 연상할 만큼 지난 날의 결핍은 끔찍하고 지루했을 것이고 무슨 일이라도 당장 해버리고 말 에너지 역시 그 시절로부터 왔을 것이다.

그 누가, 구렁텅이 속의 여인에게
8세 어린 나이에 노름꾼 아버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가출하지만 집이 불에 타면서 일가족이 몰살하고 어머니는 살인범이 된다. 어머니의 자수로 고아원에 맡겨지게 되고 레나 정은 어릴 적의 이름을 버리게 된다.
미모와 영민함을 타고 났지만 고아라는 낙인으로 가난과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는 더욱 깊어진다. 전문대 식품학과 졸업 후 종합병원 영양사로 근무하다 레지던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이를 갖게 되자 배신을 당하면서 치욕과 절망의 순간을 다시 맞이하게 된다.
홀로 딸을 출산한 그녀는 아이 아빠의 모친을 찾아가 1천만 원에 아이를 판다. 미국으로 떠나며 레나 정은 다시 짓밟히지 않겠다는 오기로 부지런히 살아낸다. 유명 셰프가 된 그녀는 다시 돌아온 땅에서 자신이 버렸던 딸과 만난다.
레나 정은 행복할까. 자신이 믿는 행복을 갖기 위해 늘 냉정했던 그녀에게 피붙이를 돈과 바꾼 황당한 선택만을 들어 비난이 마땅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레나 정은 그 어디에도 이해를 구할 수는 없는 처지인 것이 맞다. 그러나 영원히 찍힐 낙인을 감안하고라도, 단 한순간일지언정 승리의 쾌감과 행복의 단내를 누리기를 간절히 원했던 상처받은 여자의 쇠잔한 등에 누가 단죄의 칼을 함부로 꽂을 수 있을지. 또한 그렇게 가는 길이 행복이 아니라 파멸이며, 끝끝내 죗값을 치르게 되리라고 똑똑히 가르칠 수가 있을지.
<여왕의 꽃>은 너무나 먼 곳의 희미한 행복을 두고 무모해지는 인간사를 그리고 있다. 결국 ‘악’으로 대변되던 레나 정은 진정한 뉘우침의 길로 들어설 테고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얄팍하게 정리되는 종류가 아니다. 숨 고를 틈 없이 무언가 갈구하고 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며 지나 온 레나 정의 시간은 아주 복잡다단하다.

김성령, 레나 정을 만나다

레나 정의 메인 카피는 ‘내 생애 단 한 번 행복할 수 있다면’. 첫 주연을 맡게 된 김성령은 욕망의 화신을 열연하고 있다. 최고의 셰프이면서 스타 MC인 ‘악녀’를 제대로 설정하기 위해 그녀는 부지런히 노력을 기울였다. 셰프의 인성과 삶을 보기 위해 강레오 셰프를 만나기도 하고 유사한 캐릭터를 내세운 작품들 또한 섭렵했다. 아티스트의 면모와 함께 유머를 겸비한 셰프의 세세한 면면을 김성령은 미리 그려 두고 있다.
“이대영 감독이 권해준 일본 드라마 <성녀>, <악녀에 대하여>, 그리고 줄리안 무어의 <맵투더스타>, 줄리엣 비노쉬의 <클라우드 오브 실스마리아>. 혼자 조용히 영화관을 찾아 여자 주인공들의 연기를 보며 캐릭터를 잡아나갔다.”
작품 인터뷰를 통해 그녀는 레나 정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여러 번 드러냈다. 자칫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레나 정에 대해 김성령은 “나는 내 자신을 좋아한다. 레나 정 역시 그렇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수록 삶을 포기하지 않고 꽉 움켜쥔다. 한 단계 한 단계 달라지려 노력하는 모습 또한 나와 닮았다.”고 말한다. 운명을 거스른 비정한 엄마로서의 레나 정과 그 딸의 모습은 드라마의 이미지 속에서 잘 나타난다. 백색과 노랑의 대비되는 색채로, 엇갈리는 포즈를 취해 타이틀 포스터가 탄생됐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여신들을 표현한 듯 신비로운 모습의 레나 정은 딸 이솔을 슬픈 얼굴로 끌어안고 있다.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엄마로서의 본능과 결코 끈을 놓을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고 있는 것.
네 사람의 남녀 주인공이 모두 등장하는 4인 컷 포스터 역시 드라마 첫 회 만큼이나 화제가 됐다. 수면 위에서 피어나는 빅토리아 연꽃에서 착안되고 ‘물’을 총체적 아이덴티티로 삼아 완성됐다는 이 장면은 ‘수면 위로 오르고 싶은 욕망’과 올라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네 사람 모두의 내면에는 간절함과 외로움이 깊이 박혀 있다. 붉은 드레스의 레나 정을 포커스로 한 컷은 주인공을 중심에 두고 뚜렷한 색채 대비를 통해 다양한 군상들을 표현한다.
이미지 기획자는 이 시놉에서 ‘인어공주’를 떠올렸다고 한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욕망하고 갈구하는 성공, 사랑, 행복이 어쩌면 물 밖에 나온 인어공주의 인생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부터 얻은 영감. 여왕이기도, 비운의 인어공주이기도 한 레나 정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물 속에서 마구 뒤엉켜 무겁게 젖은 드레스 자락이 순탄치 않은 그녀의 앞날을 예상하게 한다.
김성령은 이 긴 이야기를 통해 많은 여성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꾸 나아가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한 이번 캐스팅에 관해서는, 놓치기 싫은 기회였다고 말하며 40대야말로 무르익은 때라는 확신을 전했다. 과연 김성령의 전성시대다.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이 없었던 아쉬움을 때로 우스갯소리 섞어 토로했던 당시에도 이미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타이틀 롤에 대한 중압감이 없지 않을 터이지만 레나 정의 면면에 애착을 가지고 작업 중인 김성령을 기대해 봐도 좋다.

행복을 위해 피워진 욕망

<여왕의 꽃>은 레나 정뿐 아니라 다수의 욕망을 말한다. 아들을 그룹의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온갖 술수를 서슴지 않는 마희라, 딸을 재벌 집에 시집보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최혜진 등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내는 악녀들의 내면을 함께 볼 수 있다.
이솔(레나 정의 딸, 이성경 분)의 생부 서인철 캐릭터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경우다. 그가 일하던 병원장 딸인 혜진의 모습은 교묘하게 레나 정과 겹친다. 병원장의 딸로 태어나 교만하고 거만하게 살아온 혜진은 딸을 이용해 병원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경쟁하듯 각자의 목적을 위해 술수를 쓰고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 조금은 안쓰럽기도 한 이 드라마 속 인간들은 알고 보면 달콤한 행복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최악의 선택을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폐건물에서 한 남자를 마주친 레나가 그가 내민 휴대폰 화면을 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고, 목이 조이는 등 협박을 당한다. 이윽고 남자가 건물 밖으로 추락하는 장면은 레나를 둘러싸고 벌어질 엄청난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모은다. 이제 막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숨기고 싶었던 과거가 드러날까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한 레나의 모습. 레나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도신이 MC이자 스타 셰프로 성공한 그녀를 협박한다.
레나 정은 유명 레스토랑에 입사해 입지를 다지기 위해 온갖 자작극과 수를 부려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악착같이 풀어나가고, 목표 삼은 것을 놓치지 않도록 고도의 노력을 하며 얻어낸 결과가 한 순간 위태로운 절벽 끝에서 몽땅 사라질 찰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이 장면이 만들어진 곳은 가오슝의 랜드마크인 치허우 등대가 있는 치우허 산. 치허우 등대는 1916년에 만들어진 곳으로, 등대 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불안한 레나 정의 시간을 표현하기에 적격이었다. 누군가를 속이고 짓밟으면서 성공해야만 행복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는 악한, 어리석은 본성들이 밀도 있게 그려진다.

김민식 감독은 “<여왕의 꽃> 기획의도를 보면서 막장 드라마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며 ‘출생의 비밀이라든지 이복형제간의 암투 설정 등 소재에서 오는 문제 제기’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막장인지 아닌지는 이야기의 개연성과 사건의 연속성의 문제라고 일축했다. 이를테면 악역을 맡고 있는 조연들의 히스토리가 불명확한 장치로서의 전형적인 악인으로 풀어졌다면 드라마는 ‘막장’의 표식을 떨칠 수 없었을 거란 이야기다.
<여왕의 꽃>에선 레나 정의 이야기와 함께 재벌 후처로 들어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한 모성애, 가문을 더 키워야 한다는 야심에 딸을 재벌가로 시집보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모질게 딸을 통제하는 모성애가 다뤄지고 있다. 제작진은 줄곧 이 드라마를 ‘행복’에 관한 것이라 소개한다.
글쎄, 아직은 누구도 행복감으로 미소 짓는 인물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겠다. 그렇다면 점점 제자리를 찾으며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하고 선한 인간으로의 회귀를 확인시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라는 속뜻일지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그런 결론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게 됐다. 과감한 악행과 무서운 욕망, 그 대가가 되는 뼈아픈 운명 또는 필연까지가 누군가의 성취감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그의 행복이다.
<여왕의 꽃>은 이 같은 논리를 인정하면서 서서히 행복이라는 개념을 재조명한다. 강요당해온 행복들, 딱히 악착같은 기질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부추겨진 무리한 행복의 가면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뜯어봐야겠다. 레나 정과 딸 이솔이 곧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걷는 일 없이 늘 위쪽을 향해 서두르며 과거의 오류 같은 것은 떨친 채 살아왔던 여자가 버렸던 딸을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자책과 충격은 극대화된다. 갖가지 모양과 색깔의 ‘충돌’로 이뤄진 <여왕의 꽃>의 백미는 아마 이 재회를 기점으로 더 빛을 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