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양순 전남친환경농업교육관장, 생명을 살리는 유기농업을 전파하다

오가닉 리더

2015-12-28     권지혜

생명을 살리는 농부가 되고 싶었다는 전양순 전남친환경농업교육관장. 그가 택한 것은 유기농이었다. 굶어 죽을 각오로 시작한 지 벌써 30여 년. 농사짓는 틈틈이 농민, 소비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도 열심이다. 그가 관장으로 있는 전남친환경농업교육관에는 해마다 4천 명 이상이 바른 먹거리와 유기농업 방법, 그리고 효소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다. 전 관장에게 듣는 유기농업의 미래.  

전양순 관장은 34년 전 처음 유기농업에 발을 들였다. 유기농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그때, 그는 고향인 전북 임실에서 유기농을 실천하던 김종복 선생님과 장금실 사모님을 통해 어릴 적부터 환경 문제와 유기농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한 농사가 아닌 하늘과 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의 삶이 곧 유기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풀무원 공동체에 연수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3년의 연수 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함께 유기농을 실천하던 남편을 만나 지금까지 유기농업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할 당시는 유기농에 대한 주변의 인식 부재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으며 시작한 유기농업

전 관장이 유기농업을 시작한 1982년에는 ‘유기농’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나라에서 식량 증산 정책을 펼치며 통일벼를 보급하고, 무분별한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남발하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전 관장은 정농회(바른 농사를 하는 모임)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진행하는 연수회나 교육을 통해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오염된 땅을 다시 되살리고자 제초제를 쓰지 않는 대신 밤낮으로 논에서 잡초를 뽑았다. 하지만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 미질이 떨어졌다. 농약을 쓰지 않으니 병충해가 한 번 오면 손쓸 수도 없이 그해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의 비난과 질타도 힘들었다. 논둑에도 제초제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풀이 무성했는데, 이쪽 논에 병충해가 오면 자신들의 논에도 병충해가 넘어온다며 비난했다. 장터에선 미질이 좋지 않으니 한쪽 구석에서 팔라며 구박을 받기 일쑤였다. 
그 당시의 유기농에 대한 인식이 그랬다고 한다. 유기농업을 실천하려면 삼대가 굶어 죽을 각오, 삼대를 무식쟁이로 만들 각오,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 각오로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유기농업을 하면 빨갱이, 공산당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난보다 유기농업을 실천하면서 무엇보다 어려웠던 점은 우리나라에 유기농업에 대한 농법과 기술을 배울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정농회를 통해 여름, 겨울 합숙 연수를 받고, 일본의 ‘애농회’ 단체와 정보 교류를 했으며, 농업 선진국인 독일 등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배운 기술을 우리 땅에 맞게 다시 연구하고, 또 유기농에 맞는 토종 종자를 연구했다. 
그렇게 생산된 유기농 쌀은 한 번도 농협이나 정부 수매를 해 본 적 없이 모두 직거래로 판매했다. 유기농이 어떤 것인지, 왜 유기농을 먹어야 하는지, 유기농으로 생산한 쌀 한 톨이 가지는 가치를 일일이 설명해 주며 직거래 고객을 확보해 나갔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볼품없고 질이 떨어져도 유기농을 실천하기 위해 애쓴 노력을 인정해 주며 유기농 쌀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며 어느덧 판매가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유기농을 고집할 수 있었던 원동력

유기농업을 열심히 실천해 나갔지만, 그 역시 어렵고 힘든 일이 수없이 많았다. 수확도 못 하고 병충해와 잡초와 씨름을 하다 하루가 다 가기도 했다. 어느 해에는 수확기에 들어 벼멸구가 전국에 퍼진 적이 있는데, 다른 농가에서는 농약을 뿌려 피해를 막았지만 전 관장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식 같은 벼 이삭을 벼멸구가 다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임신 중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나는 잡초를 뽑다가 논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같이 들에 나왔다가 큰아이는 비가 많이 와서 불어난 고랑에 휩쓸려 내려가기도 하고, 둘째 아이는 농기계에 깔려 폐렴으로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는 논에서 같이 비 맞고 땡볕에서 고생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미안함이 앞선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꿋꿋이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 조금이라도 우리가 사는 지구와 인류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바람, 우리 아이들에게 깨끗한 환경과 건강한 삶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주위의 비웃음과 가족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유기농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다. 그는 오히려 제초제, 화학비료, 농약의 남발로 갈수록 오염되고 황폐해져 가는 농토를 보면서 하루빨리 유기농을 더 확산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유기농을 전파하다

전 관장은 유기농업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널리 알리고 확산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땅이 회복되고 농사가 안정되며 유기농업이 마냥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욱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 명분이 생긴 것이다. 또한 초창기 농사로만 수입을 내기 힘들었을 때 각종 산야초를 발효시킨 효소액을 만들기 시작하여 부가가치를 올렸기 때문에 그런 기술들을 많이 알려서 더욱 많은 농가의 소득 안정에 도움이 되길 바랐다. 
점점 많은 사람이 농법이나 기술을 배우러 그를 찾았다. 지금은 저비용으로 고효율을 낼 수 있는 친환경 농법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전에는 전국 각지에 걸쳐 강의를 다녔지만, 2009년부터는 전라남도에서 친환경 농업교육관으로 지정받아 교육원을 건립하면서 더욱 많은 교육생이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올해 벌써 4천 명이 넘게 다녀갔다고. 또한 여태껏 믿고 구매해 준 소비자들에게 직접 생산 현장에 와서 누가 어떻게 쌀을 생산하고 가공하고 포장해서 배달해 주는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현장 체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한 번 농장에 다녀간 소비자들을 통해 더욱 입소문이 났다. 이제는 ‘강대인 생명의 쌀’ 하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유기농 쌀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다. 
요즘은 농촌 교육 농장으로 지정받아 농업인과 소비자뿐만 아니라 농업의 미래 일꾼이자 소비자가 될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험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전양순 관장이 말하는 유기농업의 미래

그는 “유기농업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많은 노동을 감내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작물을 연구하는 자세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유기농업을 꾸준히 이어 나가려면 무엇보다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를 절대 놓지 않아야 한다. 
“저는 항상 유기농업을 하는 농부들은 환경을 보존하고 사람을 살리는 귀한 직업을 가졌고 인류에게 꼭 필요한 귀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런 신념을 지니고 묵묵히 해 나가다 보면 어려움은 금세 극복할 수 있고 부농의 꿈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관장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기농업만이 희망이고 살길이라고 했다. 백세시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화두가 되는 건강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먹거리가 하기 때문이라고. 바른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또한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이 땅과 자연을 깨끗하게 지켜가야 하는데, 환경 보전 차원에서도 유기농업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유기농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남아 있지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유기농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는 함께하는 친환경 농업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모든 지구에서 유기농업이 이뤄지는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유기농업의 미래는 참 밝습니다.”

그가 남편과 했던 결혼 서약은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바른 농사를 짓겠습니다”였다. 지금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대신 큰딸이 그 일을 이어가고 있다. 전 관장에게 소원이 있다면, 죽는 날까지 이 길을 계속 걸어가서 모든 사람이 유기농 먹거리를 먹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가 있어 유기농업의 미래는 참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