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보아 키워낸 어머니 성영자 씨를 만나다 '딸아, 너는 나의 행복이란다’

2010-11-11     매거진플러스

서글서글한 눈빛, 환한 미소가 딸과 참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단정하고도 온화한 모습의 이 중년 부인은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보아의 어머니 성영자 씨. 그이는 막내 보아를 비롯해 서울대를 졸업한 피아니스트 큰아들 순훤 씨와 홍대 미대 출신의 뮤직비디오 감독인 둘째 순원 씨를 키워낸 특별한 감성교육법의 소유자다. 그런 교육관을 바탕으로 그이는 세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낸 이야기를 한 권의 책, ‘황금률’에 담아내기도 했다. 시종일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이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부드러운 것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아이들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줬어요. 화를 내고 나무라기보다는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편이었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적어도 한 가지씩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으로 아이들의 재능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이들의 몸부림에는 다 메시지가 있으니까요.”

언제 어디서나 톡톡 튀던 어린 시절
“성모님께서 온화한 미소로 저를 부르며 ‘너는 딸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하늘을 손끝으로 가리켰는데, 그곳에 십자가 모양의 빛이 있었죠. 세 군데서 아주 강하게 빛나고 있더라고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성영자 씨가 보아를 낳기 전에 꾼 태몽이다. 보아는 아들 둘을 낳은 뒤 5년 만에 얻은 딸로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 애교 많은 막내딸이었다. 어머니의 기억 속 보아는 세 살 때부터 입버릇처럼 가수가 되겠다며 자신의 꿈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남다른 아이였다. 거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춤추기를 좋아하던, 춤 연습이 끝날 만하면 아침이 올 때까지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바로 보아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피아노학원을 보냈는데 잠시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니 피아노보다는 가야금에 더 흥미를 느꼈어요. 결국 가야금을 사주자 피아노를 젖혀놓고 한 3년 가야금에만 매달리더니 아무래도 자기는 노래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분명히 말하더라고요.”
부모로서 딸이 노래만 부르다 학업에 소홀하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보아는 공부에도 관심을 보였고, 초등학교 때 전교회장을 할 정도로 학교 생활도 착실히 해나갔다. 또한 가수 연습생으로 1년 넘게 새벽까지 연습을 거듭하던 시기에도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등 신기할 정도로 어른스럽고 야무지게 자기 일을 착실하게 해나갔다.
“우리 딸은 욕심이 많아서인지 중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어요. 작고 아담한 체구 어디에서 그런 열정이 샘솟는지 엄마인 저도 궁금할 정도죠.”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보아는 유독 또래 아이들보다 튀는 것을 좋아했다. 방과 후엔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헤어스타일과 옷 스타일에 대해 한참을 토론(?)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엔 친구의 멀쩡한 바지를 잘라 핫팬츠를 만들어줘 그 어머니에게 항의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이렇게 톡톡 튀다 보니 알게 모르게 주변 친구들에게 시샘도 많이 받았다. 한번은 애지중지하며 아끼던 흰색 스판 재킷을 선배에게 빌려준 적이 있는데, 옷이 다 찢긴 채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교회장에 공부도 잘하고 남보다 항상 튀었던 보아를 질투한 나머지 옷을 일부러 찢은 것이라고 했다. 보아는 그런 경험을 통해 세상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배우며 점점 더 성장해갔다.

월드스타가 되기까지
지금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둘째 오빠 순원 씨를 따라 백화점에서 마련한 댄스대회에 나가게 된 보아. 당시 SM엔터테인먼트 관계자의 눈에 띈 보아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남편은 가수의 길이 불확실하다고 걱정하며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어요. 하지만 아이의 적성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적합한 기회라는 판단이 섰고,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결정을 내리게 됐죠.”
그후 보아는 일본에서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다. 막상 딸의 꿈을 지지하던 어머니 성영자 씨도 낯선 타국에서 홀로 연습할 보아를 생각하면 걱정과 염려가 가시지 않았다. 부모 없이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는지, 잠잘 곳은 편한지, 어려운 일을 겪지는 않을지 등 날마다 이어지는 걱정과 고민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엄마가 걱정할까 봐 아플 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속 깊은 딸이기에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보아가 그러더군요. ‘엄마, 여러 명과 경쟁해서 얻어낸 중요한 기회야. 내 선택을 믿어주면 좋겠어’라고요. 어찌나 대견하던지…. 힘든 일을 많이 겪었을 텐데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항상 행복해했던 아이였어요.”
2000년 여름의 어느 날, 성영자 씨를 비롯한 보아의 가족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가슴에 담았다. 그토록 기대하고 기다렸던 보아의 데뷔. 마냥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던 열세 살의 막내딸이 대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며 가족 모두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스타 탄생을 예고하는 서막이 올라가고, 보아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말 많고 탈 많은 연예계에서 굳건히 자신의 영역을 지켜오고 있다.

위기는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삶은 늘 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말이 있듯이 성영자 씨 가정에도 한 차례 어려움은 있었다. 아이들도 아무 문제없이 자기 꿈을 갖고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고, 남편의 농장 일도 잘되어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을 즈음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남편이 지방의회 의원에 출마했다. 하지만 두 번 연속 아깝게 낙방했고,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기에 이르렀죠. 길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 우리 가족은 경매된 집을 구할 당시 같이 사두었던 밭에 임시로 집을 지어 생활할 수밖에 없었어요. 보아가 막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는데 부모로서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었죠. 서로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더욱 똘똘 뭉쳤고, 절대 좌절하거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보아가 데뷔하고 난 후, 남편과 둘째 아들은 계속 그 집에 머물고 큰아들 순훤 씨는 고시원에, 보아와 성영자 씨는 서울 여동생 집에서 잠시 얹혀 살게 되었다. 당시 우유판촉, 보험설계사 등 생활전선에 뛰어들며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성영자 씨. 아직도 그 시간을 떠올리면 긴 한숨이 나올 뿐이다.
“전업주부로 살림만 해온 저였지만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맨몸으로 사회로 뛰어들었어요. 그것만이 부모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또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죠.”
보아가 데뷔 무대를 가질 무렵에도 가족에게 당장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막내딸이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행복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이들 누구 하나 삐뚤어지지 않고 엄마, 아빠를 이해해주고 따라와줘서 너무 감사할 뿐이에요. 그런 오빠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 보아도 엄마가 자신을 걱정할까 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저를 위로해줬어요.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이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가족은 더욱 서로를 부둥켜안게 됐죠.”
지난 8월, 5년 만에 국내 가요계로 컴백한 보아는 6집 음반 활동을 완전히 마무리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