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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추원재’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추원재’
  • 유화미 기자
  • 승인 2017.09.01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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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 생가 35
 

조선 성리학의 학통은 정몽주에서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과 조광조로 학맥이 이어지며 공식화되었다. 경상남도 밀양시에 위치한 추원재는 1389년 김숙자가 처음 거처를 정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종직이 태어났으며 죽음을 맞은 집터이다. 조선 성리학의 역사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추원재로 떠나 보자.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9호로 지정된 ‘추원재’

 파란 하늘과 녹색의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인 경상남도 밀양시에서도 자연 풍광이 좋기로 이름난 곳에 위치한 추원재는 조선시대 사림파의 정신적인 고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곳이다. 추원재는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받은 길재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사림파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하는 기틀을 세운 김숙자 선생이 터를 잡았으며 그의 아들인 김종직이 평생을 보낸 집터다. 김종직은 성리학의 거두이자 ‘사림파의 영수’로 인정받고 있다.
추원재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여러 차례 전쟁을 거치며 황폐해진 건물을 사림들과 후손들이 합의를 거쳐 1810년 개조, 중건하였다. 그 이름을 추원재라 하고, 당호를 전심당이라 정하였다. 전심(傳心)이란 성리학의 전수자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김종직을 일컫는다. 1986년 8월 6일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위대했던 역사의 한 자락을 느끼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사림파 성리학의 계보

 김종직은 1431년 6월,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김숙자는 길재로부터 성리학을 배우며, 정몽주-길재로 이어진 사림파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했다. 또한 그의 아들인 김종직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며 사림파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가도록 했다.
 김종직은 사림파의 영수로 잘 알려진 인물인데, 이 외에도 세조와 성종대의 승문원의 저작, 박사 등을 역임한 관료학자이자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학풍과 인품에 감동한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뒤를 이었으며 김굉필, 조광조가 사림의 맥을 이어갔다. 사림학파의 영수라고 하면 재야에 묻혀 학문만을 연구하는 꼿꼿한 선비와 학자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김종직은 ‘관료’와 ‘문장가’라는 키워드로 대변되기도 한다. 특히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쓴다는 명성이 자자했는데, 30세에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사가 되기도 했다. 이때 승문원의 어세겸은 그의 시를 보고 “나보고 말채찍을 잡고 하인이 되라 해도 그리 하겠다”라고 탄식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성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왕명으로 수많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세조의 왕세자빈 한씨의 애책무을 짓기도 했으며 인수대비의 옥책문 등의 문장을 짓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뛰어난 문장력은 훗날 수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으며 김종직 자신은 이미 죽은 시신이 부관참시당하는 화를 입게 되는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다.

사림이 화를 입다, ‘무오사화’

 김종직이 조정에서 주요 관직을 맡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사림파를 중앙으로 불러들이던 시기와 일치한다. 성종은 사림을 언론 삼사에 임명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와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이렇게 성장한 사림파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성종의 의도대로 훈구파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훈구파에겐 이런 사림파가 눈엣가시였을 터,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문제 삼으며 유자광, 이극돈 등의 훈구파는 사림파에 화를 입히게 된다. 사화란 ‘사림이 화를 입다’라는 뜻으로, 무오사화는 무오년에 사림이 입은 화를 의미한다.
 김종직이 생전에 작성한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희생당한 중국 초나라 왕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이었지만, 죽임을 당한 의제를 단종, 왕을 죽인 항우를 세조를 상징하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만들면서 실으려 하자 훈구파는 사림파가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일을 비난한다고 주장하며 연산군에게 보고한다. 세조를 비난하는 것은 세조의 뒤를 이은 성종과 연산군까지 부정하는 일로,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던 사림파는 한순간에 연산군에 반대하는 세력이 되어 버렸다. 평소 연산군은 자신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사림파를 탐탁지 않아했고 이 일을 기회 삼아 많은 사림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나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그의 깊은 역사적 식견과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 준 문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 ‘예림서원’

 김종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추원재 말고도 한 곳이 더 있다. 바로 추원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예림서원’이다. 예림서원은 김종직의 뛰어난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67년 이도우가 창건해 위패를 모신 곳으로 처음엔 덕성서원이라 불렸다. 후에 퇴계 이황이 김종직을 추앙하며 점필서원이라 이름 바꾸고 친필로 편액을 써 걸었으나 임진왜란 때 퇴락되었다. 1606년에 퇴락된 위판을 봉안하고 서원을 중수하였다. 1635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으며, 서원의 명칭을 예림서원으로 바꾸고 박한주와 신계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현종 10년 예림이라는 이름의 사액 서원이 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874년 복구와 개편을 거쳤다. 이후 몇 번의 보수와 중수를 거치며 유림들의 강학과 집회소로 사용되었다. 김종직과 박한주, 신계성의 위패가 봉인된 3칸의 육덕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의 장소로 이용되는 3칸의 강당, 수학하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3칸의 돈선재와 직방재, 이 외에도 전사청, 몽양재, 독서루, 삼문, 고상 등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정문 옆에 위치한 장판고에는 김종직이 쓴 <이준록>과 <점필재>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예림서원은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3월과 9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Queen 유화미 기자] 사진 및 자료 제공 밀양시청 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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