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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 50주기, 아내 김현경의 회고
김수영 시인 50주기, 아내 김현경의 회고
  • 송혜란 기자
  • 승인 2018.08.15 2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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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인 김수영, 그리고 절대사랑’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의 회고 '영원한 자유인 김수영'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의 회고 '영원한 자유인 김수영'


근대시 역사에서 자신만의 특출한 행보로 혁신을 주도했던 김수영 시인.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보며 일상 언어로 시를 써온 그다. 1968년 48세라는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그는 우리 문학 속에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자리 남았다. 올해 6월, 그가 떠난 지 딱 50년이 되었다. 생전 그의 육필 원고를 대신 써 줄 만큼 문학적으로도 깊이 교감했던 아내 김현경 여사는 그를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Queen 2018년 6월호)
 

문학에 푹 빠졌던 미모의 신여성. 김현경 여사의 젊은 시절은 그랬다. 당시 미와 지성을 모두 겸비한 그녀는 남성 문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애초 김수영 시인은 그녀의 스승이었다. 1942년 그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도쿄 유학 동기였던 이종구를 통해 처음 김 시인을 만났다는 김 여사. 이듬해 그가 귀국하면서 둘은 급격히 가까워졌으며, 1950년 4월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둘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 시인은 징집당해 전선으로 나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머물게 되었다. 1952년 그가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나온 뒤 둘은 부산으로 피난 갔지만 판잣집 생활을 면치 못했다. 예전부터 그녀를 흠모했던 이종구의 끈질긴 구애와 경제적으로 힘든 결혼생활을 못 이겨 두 차례 이별과 재회라는 아픔을 겪기도 한 그들이다. 그럼에도 숱한 장애물이 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로지 집필에만 전념하는 남편 탓에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김현경 여사. 영어와 일본어에 능한 남편이 가끔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거나 대학 강연에 나가기도 했으나 두 아들을 키우는 데 턱없이 부족한 벌이였다. 다행히 평소 바느질에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지인들의 옷을 손수 만들어주며 돈벌이를 할 수 있었다. 꽤 탁월한 그녀의 재단 솜씨에 입소문이 퍼져 큰돈도 만졌지만 가난뱅이 시인의 아내 인생은 꽤 고달팠다.
“그만큼 뛰어난 그의 작품을 지켜주고 싶었어요.”

남편은 혁명가였다

언제나 김수영 시인의 첫 독자는 자신이었다는 김현경 여사.
“항상 남편은 시상이 떠오르면 백지를 찾아 빠르게 썼어요. 원고지뿐 아니라 선이 그어진 모든 종이를 뒤집어 사용했지요. 잡지사에서 보내온 마분지 봉투를 자주 애용했어요. 초고를 원고지에 또박또박 다시 옮겨 적는 것은 늘 제 몫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그의 시를 접했던 그녀의 소감은 어땠을까?
“그야말로 모든 작품이 완성도가 높았어요.”

올해 김 시인의 사후 50주기를 맞이하며 그가 지금껏 살았다면 작품이 더 깊고 완성미가 더해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새파란 청춘의 그를 잃었다는 애통함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그의 50주기 기념 <김수영 전집>을 다시 낸 그녀의 생각은 사뭇 남다르다.

“그이가 더 오래 살았다면 훌륭한 시를 썼을 것이다? 천만에요. 제가 이번에 그의 시를 쭉 읽어보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완성된 작품이었어요.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그의 시는 언제고 현실을 이탈한 법이 없었지요.”

그가 남긴 시는 총 182개. 이 중 하나도 문제시가 아닌 것이 없다며 그녀는 예찬했다. 특히 최근 사드 문제를 지켜보며 그녀에게 떠오른 김 시인의 작품은 <가다오 나가다오>이다.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 것이니
(…)

-김수영 시인의 <가다오 나가다오> 中

“이 시는 그이가 1960년에 쓴 거예요. 선견지명도 보통이 아니지요. 김 시인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존경받아야 할 혁명가라고 봅니다. 조용히, 우리의 힘을 지켜야 한다. 미국보다 우리의 힘이 더 크다고 믿는다는 의미가 곁들여 있어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실린 그의 대표작 <풀>도 떠오르는 대목이다. 

자유 그리고 사랑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김현경 여사는 꼭 남편 김수영 시인뿐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시인이라는 일념이 강하다. 오직 시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기 때문이란다. 이는 김수영 시인의 철학이기도 하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는 자유인이었어요. 그리고 그 밑에는 절대 사랑이 깔렸지요.”

김 시인은 작품 활동에 있어서만큼은 매우 철두철미했다. 집에서는 술 한 모금도 안 마실 뿐 아니라 그 누가 찾아와도 만나는 법이 없었다. 
“그때 고은이도 내쫓았었지.”
이에 사람들은 그가 서재에만 파묻혀 아내와의 사랑에도 고리타분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근래 미투운동을 계기로 과거 남편의 성에 대해 돌이켜봤다는 김 여사는 그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운을 뗐다. 생전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은 무척 각별했다고 잘 알려져 있다.

어둠 속에 비치는 해바라기와……주전자와……흰 벽과……
불을 등지고 있는 성황당이 보이는
그 산에는 겨울을 가리키는 바람이 일기 시작하네

나들이를 갔다 온 씻은 듯한 마음에 오늘 밤에는 아내를 껴안아도 좋으리
밋밋한 발회목에 내 눈이 자꾸 가네
내 눈이 자꾸 가네

(…)

의지의 저쪽에서 영위하는 아내여
길고 긴 오늘 밤에 나의 사치를 받기 위하여
어서어서 불을 끄자
불을 끄자

-김수영 시인의 <사치> 中

“그이는 모든 면에서 진지했지요. 그저 흐지부지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어요.”

정직한 모더니스트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은 통하지 않았다는 김수영 시인. 아내 김현경 여사가 추억하는 그는 한마디로 정직한 모더니스트였다. 아름답고 순수한 시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세속적 언어로 비루한 현실에 돋보기를 들이댔던 그는 일상의 언어로 시를 썼다. 돌출적 상상력은 이전에 없던 세계를 보여주며 문단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충분했다는 게 실제 평론가들 사이에서 오가는 그의 평이다. 급진적 주장을 하면서도 이념의 노예가 아닌 시인의 양심과 시민의 양식에 충실한 것도 그의 아름다운 덕목이다. 예술이 가야 할 길은 정치보다 훨씬 위에 있다고 믿은 시인이 되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소월, 정지용, 서정주로 이어진 근대시 역사에서 그의 존재감은 잊히기는커녕 갈수록 더해지고 있는데….

“그와 살며 하루도 똑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마치 매일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았지요. 그의 투철한 삶의 가치관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당대 여성의 신분으로 그녀가 가장 역할을 대신하며 그의 모든 생활을 서포트한 이유다. 1968년 김 시인은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떴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자식을 거뜬히 키워냈다.

“김수영이라는 거물이랑 살다 보니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 않더군요.”

어느덧 그녀의 나이는 90세를 훌쩍 넘었다. 외모는 여전히 고왔다. 단정하게 신경 쓴 머리와 화장. 사진 촬영을 위해 어느 스카프를 메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그녀에게서 소녀 감성마저 느껴졌다. 아직 남편의 유품을 다 버리지 않았다는 그녀는 지금도 그와 동거하는 기분이라고 설레 했다. 그가 선물하고 간 아들네와 손녀가 가끔 찾아와 그녀를 위안하곤 한다. 하루에 꼭 서너 시간 신문을 읽을 정도로 건강은 정정한 편. 여기에 젊었을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을 사 모은다는 그녀의 집안 풍경이 큰 여운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그이는 김수영 시인의 사후 50주기를 맞아 그의 문학 작품들이 다시금 평가받을 수 있기를 소원했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Queen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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