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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천년의 역사가 잠들다
법주사, 천년의 역사가 잠들다
  • 유화미 기자
  • 승인 2018.11.09 1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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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등재 한국의 산사1
한오현-가을법주사
한오현-가을 법주사


한반도 중앙의 명산인 속리산 깊숙이 자리한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지어진 이래 우리나라의 중심 사찰의 역할을 해 온 유서 깊은 곳이다. 유네스코는 지난 6월 30일 한국의 산사 7곳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 중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했는데, 법주사도 그 중 한 곳으로 당당히 포함되었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으로 등재되다

7세기와 9세기에 걸쳐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면서 수많은 사찰을 창건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 정책이 실행되었고, 도시 사찰의 대부분은 강제로 철거되었다. 그 와중에도 일부 산사들은 폐사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 오늘날까지 문화적 전통을 이어오며 불교문화의 중요한 유산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지난 6월 30일 개최된 제 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목록 중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 유네스코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은 총 7곳으로 법주사,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다. 이 사찰들은 지난 2013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으며, 5년 후인 2018년 21개의 위원국 중 17개국이 공동 성명했고, 20개 위원국이 지지발언을 하면서 전체 위원국의 지지를 받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의 13번째 세계유산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유네스코는 7개의 사찰이 7~9세기 창건 이후 현재까지의 지속성, 한국 불교의 깊은 역사성이 세계유산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기준 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에 해당한다며 평가 기준을 설명했다.

등재 결정과 함께 세계유산위원회는 4가지 사항을 권고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산사 내 건물 관리 방안을 마련하고, 산사 종학정비계획을 수립하며 세계유산 등재 이후 늘어날 관광객 대응책을 준비함과 동시에 산사 내 건물 신축 시 세계 유산 센터와 사전에 협의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는 산사에 대한 더욱 강력한 보존과 보다 완벽한 보호, 관리를 주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문화재청은 “권고사항을 충실히 수행하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의 세계유산적 가치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천년의 세월 동안
불교문화의 가치를 이어 온 법주사

황순구-법주사의 야경
황순구-법주사의 야경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고승인 의신조사가 처음 이룩했다고 전해진다. 구법여행을 갔다 돌아오던 의신조사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터를 찾아 헤매다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자 흰 나귀가 더 이상 걷지 않고 그 자리를 맴돌았다고 한다. 의신조사는 그 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의미로 사명을 법주사(法住寺)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성덕왕 19년에 절을 중수했고,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해 대찰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이렇게 여러 번의 중추를 거치며 큰절로 성장한 법주사는 고려 시대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 인종이 이자겸 일파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법주사에서 점찰법회를 열었다. 왕이 점찰법회를 열었다는 것은 법주사가 당시 절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경상북도 안동까지 피난 갔다 환궁하던 공민왕이 법주사에 들렀다고 전해지고, 조선 태조는 즉위 전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병에 걸린 세조도 이 곳에서 사흘 동안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 위엄을 떨치던 법주사는 선조 30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승병의 본거지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안 왜군의 계획적인 방화로 불에 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 후 사명대사 유정이 중건을 주도해 선조 35년 팔상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보은의 얼굴, 법주사

한오현-법주사 팔상전
한오현-법주사 팔상전

 

보은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는 속리산에 위치한 법주사이다. 법주사에는 팔상전, 쌍사자석동 등 국보와 보물 12점과 지방유형문화재 22점, 천연기념물 1점 등 많은 문화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팔상전이다.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오층목탑으로 국보 제 55호이다. 원래는 목탑이 많이 있었지만 몽골의 침입이나 왜의 침략 등의 전란 때 대부분 불 타 버렸고, 1984년 화순에 위치한 쌍봉사 대웅전에 있던 삼층목탑이 불 타 소실됨으로써 팔상전만 남게 되었다.

팔상전은 팔상도를 모신 건물이라는 뜻을 지닌다.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시작으로,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는 장면, 궁궐의 네 문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는 장면, 출가 하는 장면,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 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 바로 팔상도 이다.

팔상전 안에는 정 가운데 네 기둥 사이로 벽을 만들고 한 면에 두 장씩 팔상도를 두었다. 팔상전의 짜임은 목탑을 올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보이며 3층 법당인 금산사 미륵전에서도 이와 같은 짜임을 볼 수 있다. 팔상전 또한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5년에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땅 속에 묻혀 있는 월대와 한가운데 놓인 계단은 통일 신라 때의 것이라고 한다. 소실 이후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이 팔상전이라는 사실을 보면 법주사의 핵심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재건하는 데 무려 21년이나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간다. 법주사에는 팔상전 외에도 대웅보전, 능인전, 원통보전 등 유구한 불교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으니 천천히 감상할 것을 권유한다.

법주사뿐만 아니라 주차장에서 법주사까지 가는 길도 한국관광공사가 ‘걷기 명소’로 선정할 만큼 아름답다. 입구부터 법주사까지 5리가 된다 하여 ‘오리숲길이라 불리는 이 곳은 소나무와 서어나무, 까치박달 등 다양한 식물을 감상할 수 있고, 가을이 되면 오색찬란한 단풍도 감상할 수 있다. 걷는 도중 만나는 하늘다람쥐, 수달 등 멸종위기동물도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는 선물 같은 존재다. 
 

관람정보
*법주사
위치: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사내리 209)



[Queen 유화미 기자] 사진 및 자료 제공 보은군청 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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