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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30주년'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 이 시대 문화예술이 가야 할 길
'개관 30주년'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 이 시대 문화예술이 가야 할 길
  • 송혜란 기자
  • 승인 2019.01.21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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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별 초대석
개관 30주년 맞이한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개관 30주년 맞이한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은 문화계 마당발이다. 한양대에서 극본을 전공한 뒤 방송국 PD, 예대 교수, 아트홀 관장 그리고 예술의전당 사장까지 어언 50년 동안 문화예술계에 몸담아 왔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니 하나하나 소중한 경험이었다는 고 사장은 요즘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예술 기획자의 자본이란, 돈이 아니라 경험의 축적이니까요.” 예술의전당 사장 역사상 첫 연임이라는 기록을 세운 그가 지난 6년 간 남긴 치적 또한 상당하다. 2018년으로 개관 30주년을 맞았던 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에게서 이 시대 문화예술이 가야 할 길을 물었다.

고학찬 사장의 고향은 제주도다. 초등학교 입학 당시 모교에는 학교 건물 대신 새하얀 청보리밭이 자리해 있었다고 한다. 학교를 짓기도 전에 학생부터 뽑은 것이다. 칠판을 앞에 두고 수업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선생님은 그를 포함한 학생들을 인근 용두암으로 데려갔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업은 노래 부르기.

“선생님이 저희를 바위에 앉혀놓고 오로지 노래만 가르쳤어요.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그때 노래 수업이 제가 최초 문화예술과 인연을 맺은 가장 멀고도 근본적인 계기입니다.”
행복은 지나 봐야 정의할 수 있다고 했던가. 초등학생 시절 교실에 앉아 공부하고 싶었던 그 역시 되돌아보니 그때처럼 보람찬 순간은 없다고 되뇌었다. 자신만이 가진 소중한 경험이기 때문이란다. 이후 그의 삶에서 쭉 지속된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다.

예술가의 아이디어 원천은

고 사장의 별명은 ‘아이디어 창고’다. 서리풀 청년 아트갤러리를 비롯해 서울서예박물관 재개관, 싹 온 스크린 등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은 예술의전당 사업 대부분이 바로 그의 머릿속에서 비롯되었다. 아이디어는 아무때나 나오는 게 아니라는 고 사장. 자신이 본 풍경, 읽은 책, 그 안에서 무수히 느낀 감정들이 모두 녹아 흐른 잠재의식에서 솟구쳐 나오는 게 아이디어라고 그는 설명했다.

“제 입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 아이디어에 제 인생이 깃들어 있어요.”
그가 지금껏 가졌던 직업은 스물다섯 개. 이를 그는 제주도에 있는 분화구와 비유했다.

“제주도에는 한라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작은 분화구가 무려 370개나 있어요. 오름이라고도 하지요. 제 몸에는 그 같은 분화구가 스물다섯 개 있습니다.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지만 아직 채 터지지 못한 것들이 상당합니다.”

아이디어는 곧 창의력으로, 예술가에게 제일 필요한 자질이다. 이에 서울예대 극작과 겸임교수를 필두로 추계예대 문창과, 상명대, 한세대 등 교단에 오래 섰던 그가 평소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당장 길을 떠나라.’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온 삶은 굉장히 한정적이다. 평생을 살며 만난 사람, 사귄 친구도 몇 되지 않는다.

“저는 늘 학생들에게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라고 조언해요. ‘길 위에서 네가 보지 못했던 광경을 봐야 한다, 그것이 전부 너의 경험이 되고, 이는 곧 아이디어 원천이다’라면서요. 풍성한 사고를 위해서라도 항상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대학 시절 자신도 방학 때마다 혼자 여행을 갔다는 고 사장.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는 그때 길에서 마주한 산길, 냇가, 시골 할아버지, 아이들, 그들과 나눈 대화가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덧붙였다.
“그게 제 자본이에요. 저는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만이 가진 생각을 곧잘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자부합니다.”

현재 사진작가로 활발히 활동 중인 아내 안정희 한국여성사진가협회장도 그의 권유로 처음 카메라를 들었다고 한다. 대개 여성 사진작가는 산이나 들, 꽃, 나무 등 정물을 많이 찍는 것과 달리 안정희 회장의 전문은 다큐멘터리다.
“제가 도시를 찍으라고 했어요. 지금은 혼자 쿠바도 가고, 인도도 가더군요. 다큐멘터리 정신이 저보다 훨씬 뛰어나요. 가끔은 서로 언쟁도 하지만, 되도록 각자의 예술 철학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무수한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Begin Again

예술의전당 사장 역사상 첫 연임이라는 기록에 빛나는 고학찬 사장. 그는 인터뷰 내내 어떠한 질문에도 막힘없는 답을 내놓았다. 1988년 설립 후 어느덧 개관 30주년을 맞은 예술의전당에 현재 사장으로 와 있는 그의 소회는 어떨까?
“제가 지난 30년을 마무리 짓는 역할을 맡았어요. 예술의전당이 대한민국 최고 문화전당이 되고 아시아존에서도 우뚝 설 수 있었던 데는 수많은 무대에 섰던 공연 참가자들, 전시 기획자, 직원들의 공이 매우 큽니다. 이제 또 다른 30년을 향해 가야지요.”

특히 최근 영문 서예에 발을 디뎠다는 그는 첫 번째 글씨로 ‘Begin Again(비긴 어게인)’을 썼다는데….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 제목인데요. 오랫동안 음반제작을 하던 주인공이 은퇴 후 다시 거리에서 새롭게 시작합니다. 이처럼 저도 예술의전당이 만든 찬란한 토대 위에서 새로이 출발한다는 생각으로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예술의전당의 문턱을 낮추다

고 사장이 예술의전당에 온 지도 6년째다. 그간 그가 제일 주력한 일이자 최고 치적은 다름 아닌 ‘예술의전당의 문턱을 낮춘 일’이다. 정확한 사업명은 예술의전당의 공연, 전시를 영상화한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 서울에 있는 예술의전당은 지방에 있는 사람이 오기 힘들다.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입문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결국 예술의전당의 문턱이 높은 셈이다. 물론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클래식에 대한 교양이 필수다. 이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심한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싹 온 스크린이었다.

“국립오페라극단이 오페라 하나를 만드는 데 정부 예산 10억원을 씁니다. 그런데 예술의전당에서 3, 4일 공연하고 막을 내려요. 너무 아쉽지 않나요? 우리나라 국민이 5,000만명인데, 고작 5,000명만 즐기고 끝나다니…. 그래서 영상의 미를 최대한 살려 공연을 녹화한 후 시골, 군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보여줬지요. 한국뿐 아니라 세계 25개 문화원에서도 우리 영상물을 상영했어요.”

반응은? 당연히 최고였다. 한국의 공연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릴 기회였음은 물론이다.

또한 예술의전당에 서울서예박물관을 재개관한 것도 그의 공로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예술 장르인 서예가 사라져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고 사장은 서울서예박물관으로 서예를 되살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통서예뿐 아니라 국악, 캘리그라피, 거리의 낙서전 ‘그래피티’를 접목했으며, 한국 가곡, 동요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무료 공연도 함께 진행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동 클래식인 동요를 접해야 중·고등학교에 가서 가곡 등 단계를 체계적으로 밟아 이윽고 모차르트, 현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으니까요.”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문화예술이 지닌 힘

제주도에 ‘애기업개의 말도 잘 들어봐야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의 말도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있다는 고학찬 사장. 고 사장은 예술의전당 직원들 사이에서도 윗사람, 아랫사람 따지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대우하는 성품을 지닌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10년간 예술의전당 주차관리 일을 했음에도 오페라 한번 본 적 없던 요원들에게 그가 무료 티켓을 돌린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오페라 공연을 처음 본 주차 요원들은 하나같이 힐링 됐다며 그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만큼 문화예술이 지닌 힘이 크기 때문이기도 할 터. 고 사장에게 문화예술이란 무엇일까 궁금했다.
“우리가 매일 식당에서 먹는 밥은 육체를 위한 거지요. 반면 문화예술은 정신을 위한 것입니다. 건강한 정신, 높은 사고력, 깊은 세계관 모두 책이나 음악, 무용, 오페라 등 문화예술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 공연을 보고 받은 감동이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한다. 더 나아가 문화예술이 저출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고 사장.
“우리 젊은이들이 왜 아이를 안 가지려고 할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 하나가 애가 있으면 어딜 갈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오페라나 음악회에도 아이를 데려갈 수 없잖아요. 그럼 누가 애를 봐주나요? 이를 예술의전당이 대신합니다. 오페라하우스 2층에 가면 키즈 라운지가 있어요. 젊은 부부들이 애를 데리고 오면 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육아 전문가들이 케어해 준답니다. 이게 문화로 저출산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새해에도 예술의전당 문턱 낮추기라는 미션은 계속될 것이라는 고학찬 사장. 이는 앞으로 3개월 남은 임기 동안 그가 꼭 이뤄내고 싶은 꿈이기도 하다.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돼지띠입니다.(웃음) 일단 돼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돼지꿈’ 아닌가요? 운수 좋은 꿈이요. 돼지 이미지 또한 매우 풍성합니다. 항상 배가 불러 있어요. 퀸 독자 여러분도 그런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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