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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0년’ 송창식, 서정주 시인과 인연 밝히다
‘데뷔 50년’ 송창식, 서정주 시인과 인연 밝히다
  • 김문 논설위원
  • 승인 2019.03.22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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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데뷔 50년 송창식 인터뷰.
데뷔 50년 송창식 인터뷰.


피리를 부는 사나이다. 언제나 웃는 멋쟁이다. 고래사냥을 갈 때도 피리 불며 무작정 간다. ‘한번쯤 돌아보겠지’라고 해도 ‘바람 따라 떠도는 떠돌이’라며 웃을 뿐이다. 그러면서 ‘갈 길 멀어 우는 철부지야 나의 피리 소릴 들으려무나 삘리리 삘리리’라고 한다. 무정타. 못마땅해 칭얼대면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토라질 땐 무정하더니 왜 왜 왜~’라고 답한다. 특유의 ‘히죽 웃음’과 함께. 에구, 고래 잡으러 3등 완행열차나 타는 게 훨씬 낫겠다.


#장면1
인천에서 중학교 다닐 때였다. 문학의 밤이 열렸다. 서정주 시인이 강연을 왔다. “시상(詩想)을 말할 때 어떤 감동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시상이란 것을 구성할 때 그 감동의 조각들이 나와야 좋은 시가 나옵니다.”

이 말에 음악을 하던 한 중학생은 가슴 깊이에서 번득이는 생각을 했다. 아, 즉흥적으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구나, 노래도 즉흥적인 감정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서정주 시인이 말하는 이야기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그 학생은 가요계 스타가 됐다. 송창식이라는 이름으로. 라디오 방송을 할 때였다. 문정희 시인과 함께 방송하던 날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에 같이 커피타임을 가졌다. 문정희 시인이 방송 끝나면 미당 선생한테 갈 거라고 얘기 했다. 이때 송창식은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는데 같이 가면 안 되느냐고 했다. 문정희 시인이 미당한테 전화를 걸어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잠시 후 송창식, 문정희는 미당의 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술상 앞에서 노래 얘기가 나왔다. 미당은 “작곡가들이 내게 시를 달라고 하는데 곡을 쓰지 말라고 하지”라고 했다. 송창식은 마음속으로 ‘시를 가지고 곡을 만드는 것을 안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미당은 몇잔 술을 더 들이키더니 “내 시 중에 말야 ‘푸르른 날’이라는 것이 있는데 곡을 붙이면 좋을 거야”라고 말했다. 송창식은 이때다 싶어 “제가 한번 만들어볼까요?”라고 물었다. 미당은 “다른 작곡가들한테는 안 주었는데 자네가 한번 해봐”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송창식은 미당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미당전집을 사서 다 읽은 뒤 곡을 만들었다. 며칠 뒤 송창식은 미당의 집으로 가서 기타를 들고 시연을 했다. 노래를 다 감상한 미당이 “아, 이건 유행가가 아니고 클래식이네!”라고 평하자 송창식은 이 곡으로 앨범을 내고 싶다며 미당의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송창식은 1975년 앨범 ‘푸르른 날’을 내놓았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봄이 또 오면 어이하랴/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노래는 히트했고  1983년 KBS 가요대상에서 가사상을 수상했다.

미당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1980년 ‘가나다라’ 출반기념회를 집에서 했다. 이때 미당을 초청했다. 미당이 집에 오자 참석자들이 기립해서 인사를 하며 박수로 환영했다. 송창식은 미당을 조상처럼 위인처럼 생각했다. 미당 또한 송창식을 각별하게 생각했다. 어떤 모임에 같이 가면 미당은 송창식을 친구라고 소개했다.

송창식은 이런 미당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선운사’를 1990년에 작곡했다. 이래저래 미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친숙하게 지냈다. 송창식은 미당에 대해 “질마재처럼 질펀한 토속어를 신화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그러니까 언어를 가지고 노는 시를 쓰시는 분이고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유쾌한 분이며, 잔망스러운 것조차 기분이 좋게 생각했다.”며 “나 또한 그분처럼 유쾌하게 늙은 시를 쓰듯 음악도 그에 닮아가려고 했다”고 둘 간의 친밀에 대해 털어놓았다.

송창식이 밝힌 미당 서정주와의 인연은...
송창식이 밝힌 미당 서정주와의 인연은...


#장면2
1973년이다. 27살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갔다. 원래는 부모도 없는 독자(아버지는 6.25때 사망하고 어머니는 어릴 때 행발불명 돼 조부모 밑에 자랐다)여서 면제 대상이었으나 유명인이거나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면 군대에 잡혀가는 식으로 입대했다. 처음에는 기분이 안 좋았지만 군 생활 7개월은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송창식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봤다. 평점을 매겨봤다.

AFKN 방송에서 흑인가수가 나오는 걸 봤다. 또 다른 방송에서 국악 하는 아이들이 나왔다. 잘도 불렀다. ‘아, 이거 20년 허송세월했구나. 내 노래는 남이 것이 됐구나. 그럼 내 노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까지의 음악을 마음에서 버렸다. 제대하면 정말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쁠수록 좋은 것이다. 그래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만들었다.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바람 따라 가는 떠돌이/멋진 피리 하나 불고 다닌다/모진 비바람이 불어도/거센 눈보라가 닥쳐도/입에 피리 하나 물고서/언제나 웃고 다니지~’ 곧 이어 ‘한번쯤’을 만들었다. ‘한번쯤 말을 걸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여오겠지/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 와 가는데/왜 이렇게 망설일까 나는 기다리는데/뒤돌아보고 싶지만 손짓도 하고 싶지만/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봐야지~’

이 두 곡은 나오자마자 말 그대로 연이어 대박을 터뜨렸다. 아울러 지금의 송창식이 됐다. 대충 부르는 것 같지만 대충 부를 수 없는 창법으로 말이다. 항상 홀리듯 다가오고 떨리듯 가슴 속을 후벼파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특히 게슴치레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흡인력을 배가시켰다.

그의 미소에 대해 “예술고등학교 다닐 때 인천에서 열차 타느라 지각을 자주했다. 학급에 여학생 50명, 남학생 5명이었는데 지각할 때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학생들이 다들 쳐다봐서 미안한 마음에 ‘씩’ 하고 웃었다. 그게 버릇이 됐다.”고 설명한다.

송창식은 살아 있는 포크계의 전설이다. 그의 음악 인생은 올해로 50년째. 1968년 ‘트윈폴리오’ 1집 ‘하얀 손수건’으로 데뷔했으나 1969년 솔로로 새롭게 시작하면서 그는 특유의 음악적 천재성으로 많은 팬들을 확보해나갔다. ‘고래사냥’, ‘왜 불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담뱃가게 아가씨’, ‘맨 처음 고백’, ‘피리부는 사나이', '가나다라', '푸르른 날', '한 번쯤' 등을 쏟아내면서 200여곡이 넘는 자작곡으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설 명절 직전 경기 남양주 덕소에 있는 연습실. 늦은 밤에 찾아갔지만 반갑게 맞이했다. 앗,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72살의 나이인데 그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가발을 썼다. 그동안 앞부분에 머리카락이 없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했는데 말이다. 까만 색깔의 가발이 잘 어울린다고 하자 “공개석상에 갈 때만 써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가발 디자이너가 없어요. 있다면 좀 더 멋있는 걸로 주문할 텐데 말입니다”라고 하며 웃는다.

연습실 벽에는 커다란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가보였다. “덴마크에서 만든 것인데 한 1억 원 정도 될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에는 저거 하나밖에 없을 걸요.” 스피커 위에는 닥종이로 만든 인형 송창식이 기타를 들고 있었다. “닥종이를 하는 팬한테 선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살아있는 포크계의 전설, 송창식.
살아있는 포크계의 전설, 송창식.

송창식의 하루 일과 중 오래 된 습관이 있다. 그는 자고 일어나서 하루도 빠짐없이 제자리돌기 운동을 한다. 기마자세로 눈을 감고 온몸의 힘을 빼고 있으면 저절로 몸이 돌아간다. 화장실에 가서 한 시간씩 독서를 한다. 잡지든 고전 소설이든 닥치는 대로 읽는다.

잠시 화장실에 가봤더니 게이와 레즈비언의 결혼에 대한 책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무렵에 미사리 카페로 가서 공연을 한다.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가 된다. 공연이 끝나면 술 맛이 당길 법도 한데 오래 전에 끊었다. 식사 하고 자정 무렵 연습을 하고 새벽에 퇴촌 집에 가서 오후 2시까지 늘어지게 잔다. 퇴촌 집은 26년 전 개울가 옆에 마련했다.

송창식은 어릴 때 가수가 아니라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작곡을 선택하려고 했으나 가난해서 성악으로 전환했다. 그것도 독학. 처음에는 클래식을 공부했다. 그럴 때 우연히 찾아간 ‘세시봉’에서 팝송을 부르는 조영남을 보고 팝송과 대중음악에 빠지게 됐다.

그의 대표곡 중 ‘왜 불러’는 장발단속을 하는 경찰들을 향해 도망가면서 ‘왜 불러’를 자주 불러 인기를 끌었다. ‘고래사냥’은 고래라는 이상향을 노래하며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뜻에서 인기를 얻었다. 곡을 만들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청년들이 자주 불러 나중에 둘 다 방송금지곡이 됐다.

올해 공연 계획을 묻자 “2년 전 6월에 목 수술을 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과정을 지켜보며 계획을 잡을 예정”이라고 답했다. “노래란 연습이고 공부입니다. 중단 없는 연습이 중요한 것이지요. 잘 부른다는 것은 연습에 정비례합니다.”

카페에서 작은 공연을 하는 것도 연습의 일환이라고 덧붙인다. 송창식 자신만의 창법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답이 돌아온다.

“처음에는 집중해서 노래를 했는데 집중도가 80%를 넘어가면서 집중을 놓아버렸습니다. 명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집중하면 결함도 포함됩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요즘에 특별히 바쁜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제나 그렇듯 노래를 하면서 단점을 찾고 있다”며 특유의 웃음을 짓는다.
 

[Queen 김문 논설위원] 사진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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