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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회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회
  • 이복실
  • 승인 2020.09.11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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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저녁의 일이다. TV를 보던 남편이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박원순 시장이 실종되다니.” “성추행으로 경찰에 고발되었다고 나온다.” 생각지도 못한 뉴스이기에 계속 생중계를 한다. 나도 다른 일을 하 다가 TV앞으로 달려갔다.

고 박시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 세상에 슬프고, 가슴 아프고,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없겠지만 박 시장의 사망소식에는 충격까지 더해졌다. 평소에 고인이 여성인권에 많은 관심과 지지를 표명했기에 충격은 더 컸다. 사망 이후 에도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 장례식의 방법, 피소사실 유포의혹이 계속 이어져가며,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

천 만 서울시민의 살림을 책임지던 서울특별시장이자 유력한 대권주자 로 불리던 그가 갑자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4년 간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증언이 대리인인 변호사를 통하여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그가 사망하자마자 피고가 사망하였으므로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신속하게 종결하였다. 여기서 분명한 점은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해서 있는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앞으로 자살을 예방하는 차원에서라도 범죄혐의나 고발의 이유로 자살할 경우, 법을 개정하여 수사를 계속해서 진실 을 밝혀야 한다.

또, 아쉬운 점은 피해사실이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피해자로 불리지 못하고 피해 호소인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보호법(성폭력방지법) 제 3조 1항에 성폭력피해자란 ‘성폭력으로 인하여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법에도 피해자의 정의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데 왜 피해자라고 부르지 못하는 걸까? 의도적으로 부르지 않는 걸까?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에는 혐의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언제부터 이런 용어를 썼는지 찾아보았다. 금년 1월 민 주당에서 원종건 사건의 논평에서도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피해 호소인의 용기를 지지하고, 우리 당은 지난 미투 운동 이후 젠더폭력문제에서 무관용 원칙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라고 성명을 낸 바 있다.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이다. 사건의 발생지인 서울 시청에서는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하여 “피해자가 시청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변하였다.

하지만 피해자의 피해사실 시정요구를 방치 하고 외면한 상황에서 이런 변명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피해자를 피해자로 부르는 사회는 그야말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기본인데 기본도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들은 크게 반성하여야 한다. 형식적인 성희롱 예방교육 수강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일은 나에게는 해당 안 된다는 자아도취적인 방관에 서도 벗어나야 한다.

상대방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 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성폭력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지고 있는 권력을 무기로 약자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치 혀를 가지고 피해자에게 2 차 가해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깊은 내면의 성찰이 필요하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글 이복실(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전 여성가족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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