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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Queen 다시보기] 1991년 3월호 -비화 재조명/핵물리학자 이휘소
[옛날 Queen 다시보기] 1991년 3월호 -비화 재조명/핵물리학자 이휘소
  • 양우영 기자
  • 승인 2021.04.1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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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호

재미(在美) 핵물리학자 이휘소, 그 죽음의 수수께끼

우연한 교통 사고인가, 미국 혹은 소련의 계획된 암살인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핵물리학자 이휘소. 그는 정말 자신의 다리뼈 속에 핵 무기 제조 원리를 숨겨와 은밀히 박 대통령에게 넘겨 주었는가? 왜 그는 77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가? 그가 만약 살해된 게 사실이라면 누가, 어떤 이유로 그를 죽였는가? 이휘소,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돌연한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

991년 3월호 -비화 재조명/핵물리학자 이휘소1
1991년 3월호 -비화 재조명/핵물리학자 이휘소1

 

1991년 3월호 -비화 재조명/핵물리학자 이휘소2
1991년 3월호 -비화 재조명/핵물리학자 이휘소2

 

20세기 전반은 아인쉬타인. 20세기 후반은 벤자민 리의 시대

'한국 두뇌로는 노벨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있는 과학자' '어떤 과학자라도 새로운 이론을 낼 때는 그의 손을 거쳐야 할 정도' '입자 물리학 관계 구제학회에서는 그가 늘 의장을 맡을 만큼 업적과 실력을 인정받은 과학자' '아인쉬타인이 20세기 전반의 핵을 지배했다면 20세기 후반의 핵은 그가 지배' '물리학자 · 수학자 · 핵과학자로서 아인쉬타인이나 페르미 등보다 앞서 있는 창조적 지도자' ···

···이상은 모두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만나 42살 젊은 나이로 요절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학물리학자 이휘소(미국 이름 벤자민 리)에게 쏟아진 세계 유수 언론과 석학들의 찬사이다. 

이휘소는 1935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봉춘씨(작고)와 어머니 박순희씨(76)의 3남1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휘소는 유치원 때부터 수석을 빼앗겨 본 적이 없는 아이였지. 자립심도 유난히 강해 해방 후 미군들이 껌이나 초콜렛 따위를 주면 절대 안 받았고, 혹시라도 동생들이 그런 것들을 받아 오면 빼앗아 쓰레기통 속에 처넣어 버렸지. 그 애는 굶어 죽으면 죽었지 비굴해지긴 싫었던 거야.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하고, 우리 병원에서 실험하기도 즐기고···"

어머니 박 여사의 말처럼 이휘소는 전형적인 천재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 한때를 한학에 빠져 지내 회화까지도 능숙히 구사할 줄 알았다. 순전히 독학으로. 그 시절 그의 별명은 '전광석화'였다. 

경기중학을 나온 이 '전광석화'는 경기고 2학년 재학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화공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2학년에 재학중이던 54년 도미, 56년 마이애미 대학 물리학과를 역시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뒤 58년에는 석사학위, 60년에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따냈다. 박사 학위 시험 점수는 전체 평균 93점. 차점자보다 22점이나 높은 점수였는데, 이 점수는 펜실베니아 대학이 생긴 이래 최고의 점수였을뿐만 아니라 물리학과 지망생으로는 미국 전체 대학 역사에도 유례가 없는 놀라운 점수였다. 

그는 역시 '전광석화'였다. 27살에 프린스턴 연구소 회원으로 그 당시 미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물리학자가 되었으며 28살에 뉴욕 주립대학 정교수, 30살에 시카고 대학 교수 겸 페르미 연구소 이론물리부장으로 취임해 명실공히 세계 핵물리학자 가운데 1인자로 부상했다. 

이휘소는 수학적인 기교를 터득한 물리학자였다. 또한 그는 이론과 실험 현상과의 관계를 기발하게 포착해내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사에서 유인 인공위성을 달에 발사했을 때도 최종 이론 점검은 이휘소 박사의 몫이었다.

이 박사, 만약 귀국만 해준다면 60만 대군 모두는 당신의 경호원

61년 9월25일의 일기를 이휘소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겐 한 소녀와의 키스 속에 있었네. ~브라우닝의 시 'Summun Bonum'에서. 마리안느, 내가 의지할 사랑. 나는 그녀의 헌신에 늘 고마워하고 있다. 한국인이 아니라서 좀 섭섭하지만···"

일기에서 엿보이듯이 그 무렵 이휘소는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상대는 말레이지아 태생의 중국계 미국인 마리안느(현재 시카고대 교수). 그녀와는 62년5월7일 워싱턴 교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몇년 후 이휘소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슬하에는 아들 하나 딸 하나.

72년 10월,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이휘소는 단독으로 장문의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평소에도 연구실 벽에 이순신 장군이 지은 한시 '진중음(陳中吟)'을 걸어 놓고 조국에 대한 우려와 사랑을 다독이던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반갑습니다. 이 박사! 이번 기회에 아주 귀국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각하께서 유신을 철폐한신다면은···"

"이 박사가 귀국하신다면 저는 60만 대군 모두를 이 박사 한 분을 경호하는 데 쓸 마음입니다. 이 박사가 아니면 핵 개발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핵 개발이 그렇게나 절실한 문제입니까?"

"미국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늘 국익에 따라 움직이니···. 닉슨은 이미 주한 미군 철수를 시작했고, 내년까지는 완전 철수할 거랍니다. 한국이 핵을 보유한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이제야말로 이 박사, 국가를 위해 결단을 내려 주실 땝니다"(중략)

 

Queen DB

[Queen 사진_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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