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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오디세이②-자유를 향한 영혼의 모험
인문학 오디세이②-자유를 향한 영혼의 모험
  • 김종면 주필
  • 승인 2021.12.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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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vs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인문학 오디세이②-자유를 향한 영혼의 모험
인문학 오디세이②-자유를 향한 영혼의 모험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vs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두 작품을 함께 읽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두 작품을 대비 혹은 대조하는 방식으로 읽는다고 해서 꼭 공통점을 추출하거나 상이점을 지적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유로운 연상 작용에 맡기고 행간의 뜻을 읽으면 된다. 조르바의 고난을 무릅쓴 영혼의 모험을 생각하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구도소설로 보아도 무방하다. ‘싯다르타’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본격 구도소설이자 교양소설이다. Queen 인문학 오디세이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아의 껍질을 벗어야 ‘참된 나’가 보인다

최선의 삶이란 어떤 삶인가. 정답은 없다. 그것은 어차피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의 세계, 추상적인 가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더 나은 삶을 사유할 뿐이다.

수많은 사상의 영웅, 철학의 대가들이 저마다 삶의 길을 제시했다. 중국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장자는 보이지 않는 보편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최선의 삶으로 여겼다. ‘영원한 자유인’ 이백은 자신의 시 ‘산중문답’에서 마음이 절로 한가하다는 ‘심자한(心自閑)’이라는 말로 자연 속 은둔의 삶을 예찬했다. 무위자연의 삶이고 구속 없는 자유의 삶이다.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이 소설 ‘면도날’에서 이기적인 자아의 두려움이나 욕망을 넘어 영혼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선의 삶은 어찌 보면 단순한 삶이다. 거추장스런 이념이나 물신의 유혹에서 벗어나 삶의 군살을 빼고 궁극적인 삶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목표에 저당 잡힌 메마른 삶이 아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충일한 영혼의 삶 말이다.

그런 ‘작지만 큰’ 삶의 진경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의 조르바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박병덕 옮김, 민음사 펴냄)의 싯다르타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자유, 아니 절대 자유의 화신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vs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우) vs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그리스인 조르바’와 ‘싯다르타’. 두 소설을 관통하는 공통의 키워드를 찾는다면 자아, 자유, 영혼, 초월 같은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와 싯다르타의 캐릭터는 전혀 다르다. 인물의 품(品)부터 차이가 난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조르바는 고귀한 신분의 싯다르타와 달리 일개 ‘피카로(Picaro), 즉 건달에 불과하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장르상 피카레스크 소설, 악당소설로 분류되기도 한다.
 

part1 자유를 갈망하는 ‘투쟁하는 인간’의 초상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는 실존 인물이기도 한 알렉시스 조르바를 통해 특유의 ‘투쟁하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소설은 그리스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젊은 지식인인 화자가 늙수그레한 조르바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조르바는 스스로 밝힌 대로 쓸 만한 요리사이자 괜찮은 광부, 게다가 전통악기 산투르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는 재주꾼이다. 이들은 보스와 광산 노동자로 의기투합한다. 둘의 동행은 그 심상찮은 조우만큼이나 파격의 연속이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라는 문제적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조르바에게는 작가의 사상과 철학, 소소한 생활감정까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 소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카잔차키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앙리 베르그송, 그리고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카잔차키스는 20대 중반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고 니체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들로부터 받은 사상적 세례는 카잔차키스 문학에 커다란 자양분이 됐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했다. 니체에게 종교는 ‘노예의 도덕’이다. 니체가 부르짖은 신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애)’로 이어진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너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면 너의 삶은 오늘이 순간부터 새로운 가능성의 바다로 열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모르 파티’를 인간적 위대함의 한 요인으로 본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카잔차키스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그것은 고스란히 조르바의 캐릭터로 이어졌다. 조르바만큼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 사람이 있을까. 조르바는 자기긍정적 인물이다. 조르바는 신이 없는 시대, ‘신 아닌 신’을 만들어냈다. 자유라는 이름의 신이다.
 

조르바를 통해 보는 니체의 ‘아모르 파티’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의 최고 경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니체는 이 책에서 삶을 움직이고 예술을 이끄는 두 가지 원칙으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제시했다. 전자가 완벽하고 이성적인 것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감정적이고 원초적인 것을 뜻한다. 예컨대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예술충동이나 삶의 방식 같은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바가 ‘디오니소스의 현신’이라면 화자는 ‘아폴론의 환생’이다. 조르바의 자유분방한 삶은 화자의 이성지향적인 삶과 대비되어 한층 선명하게 부각된다. 조르바는 화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이, 현명하신 나의 솔로몬이여, 나의 백면서생이여.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소! 세상만사를 촘촘한 체로 거르는 그 버릇 좀 버리시오.” 촘촘한 체는 ‘아폴론의 무기’인 이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르바에게는 톱니바퀴처럼 딱 들어맞고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화자의 삶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카잔차키스 문학의 토대를 제공한 또 다른 축은 베르그송의 ‘생(生) 철학’이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에서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며, 성숙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창조적진화는 ‘엘랑 비탈(Elan Vital)’, 즉 ‘생명의 비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약동하는 생명’을 뜻하는 ‘엘랑 비탈’은 진화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조르바는 누가 봐도 엘랑 비탈 그 자체다.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진화해 나간다. ‘에스프리 포(Esprit Fort)’, 강철 같은 정신의 소유자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종교에 대해 사뭇 비판적이다. 그는 수도사 자하리아스의 입을 통해 세속화의 극을 달리는 수도원의 타락상을 고발한다. 자하리아스는 조르바와 화자가 찾아가려고 하는 아토스산의 수도원을 “성모의 정원이 아니라 사탄의 정원”이라고 단언한다.

자하리아스는 신성모독적인 말도 서슴지 않는다. “가난, 순종, 정절이 수도승의 월계관이라고들 하지요. 그건 거짓말이오! 새빨간 거짓말이란 말이오!…돈, 사내아이들, 다음 수도원장은 누가 될지, 이 세 가지가 수도승들의 삼위일체요.” 소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듯이 카잔차키스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의 면모가 뚜렷하다.

카잔차키스는 조국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참패하자 민족주의자의 길을 포기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적 행동주의와 불교적 세계의 조화를 모색한다. 그 결실 가운데 하나가 ‘붓다’라는 제목의 희곡이다. 카잔차키스는 붓다를 알게 될 즈음 이렇게 썼다. “붓다의 자비를 통해 우리는 육체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육체에서 해방되어 결국은 모든 것과 하나가 된다.”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아울러 절대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불교의 이상은 카잔차키스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대자대비에 이른 ‘최후의 인간’ 붓다를 동경해 마지않던 화자는 “인간은 짐승이다!”라고 외치는 ‘최초의 인간’ 조르바를 만나면서 그동안 자신이 들여다보지 못한 삶의 이면과 만난다. 그것은 원초적이고 야생적인 세계다. 때로는 광기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조르바는 질그릇을 만들기 위해 물레질을 하는 데 새끼손가락이 걸리적거린다고 그것을 도끼로 잘라버린다. 깨달음을 춤으로 표현할 때는 지구의 중력이 무색하게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짐을 느끼기도 한다.

“나라는 놈은 원래가 이렇게 생겨 먹었어요. 내 속에서 소리치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나는 그 놈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면 이놈이 소리칩니다. 춤춰! 그러면 나는 춤을 춥니다. 그러면 숨통이 좀 뚫리지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할까. 조르바는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화자에게 종이 나부랭이에 불과한 책을 불태워버리라고 말한다. 카잔차키스가 생각하듯 조르바가 ‘성인’이고 ‘초인’이라면 단 한 번의 춤사위로도 능히 삶의 오묘한 진실을 전할 수 있으리라.
 

사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닌 ‘살아내는 삶’을 살아라
 

조르바는 마음 가는 대로 산다. 그러나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살아내는 삶이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 무디고 둔하다고 여기는 조르바는 누구보다 영혼의 해방을 갈망한다. 조르바는 세상의 속담을 살짝 비틀어 이렇게 말한다. “새장의 배부른 참새가 되느니 연못의 바짝 마른 물닭이 되겠다.”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두려워하는 조르바는 영혼의 자유를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혼의 해방을 넘어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우주적 합일을 지향한다. 카잔차키스의 삶은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경험과 관념 등 대극적인 것으로부터 조화를 이끌어내려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가 이분법적인 세계를 멀리하고 상이한 지평의 융화를 모색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조르바는 인간이 만든 문명에 짓눌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빛은 ‘야만’에 있다고 강조한다. 거짓과 허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지독한 냉소를 퍼붓는가 하면 가증스런 위선을 물리치기 위해 섬뜩한 위악도 불사한다.

누가 조르바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봤는가. 창백한 지식인의 삶을 산 화자는 마침내 회한에 빠진다.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가 있다면…” 마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겠다는 기세다.

조르바를 통해 구체화된 자유에의 의지는 곧 카잔차키스의 것이기도 하다. 카잔차키스는 생전에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묘비명을 써놓았다. 카잔차키스라는 이름과 함께 늘 소환되는 이 글에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자유는 죽음보다 강하다. 자유를 호흡하라!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가치를 추구한 조르바의 순수한 열정, 이제 누가 있어 그 도저한 자유의 정신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조르바의 영혼은 잠들지 않는다. 조르바의 자유혼은 살아있다. 조르바티즘(Zorbatism)은 영원하다.
 

part2. ‘번뇌의 근원’ 자아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문학 오디세이②-자유를 향한 영혼의 모험.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vs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헤세는 소설의 주인공을 세존(世尊) 고타마 싯다르타와 동명이인으로 설정했다. 싯다르타는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태자 시절의 이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작가는 싯다르타가 성도(成道)해 각자(覺者)로 거듭나기 전 겪은 구도의 여정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 제목을 ‘붓다’라고 하지 않고 세존의 출가 이전 이름인 ‘싯다르타’라고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더없이 극적이다. 브라만 계급 출신인 청년 싯다르타는 왕궁을 떠나 사문(沙門)의 길에 들어선다. 생명의 근본인 아트만(Atman)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Brahman)의 일치를 추구하며 수행에 몰두한다.

그러나 치열한 명상과 단식, 신비체험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도돌이표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자아란 도대체 무엇인가.

회의에 휩싸인 싯다르타는 설법의 세계에서 지혜를 구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성인인 세존 고타마를 찾아간다. 함께 수행하는 친구 고빈다는 세존의 가르침에 이끌려 불가에 귀의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사변적인 방식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믿는다.

싯다르타는 스스로 깨닫는다. 지혜는 가르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다! 열반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 존재할 뿐이다!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무사자통(無師自通)의 경지다.

싯다르타는 다시 속세로 뛰어든다. 본능의 세계를 대변하는 장안 최고의 기생 카말라를 만나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고, 카마스와미라는 상인을 만나 장사 솜씨를 익힌다. 막대한 부를 쌓고 도박의 세계도 경험한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 세상 너머의 의미를 찾아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싯다르타는 자만자족에 빠진다.

하지만 점차 영혼의 허기를 느낀다. 싯다르타는 지금까지의 삶이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고 강가로 나가 자살하려고 한다. 강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그동안 잊고 있던 ‘옴(Om)’이라는 브라만의 성스러운 소리를 듣는다. ‘옴’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지닌 신성한 주어(呪語)다. ‘완성’, ‘완전한 것’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강이 스승이다. 강을 통해 참선을 하고 세상의 이치를 배운다. 싯다르타는 뱃사공이 되어 친구인 ‘뱃사공 성자’ 바주데바와 함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존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순례길에 나섰다가 독사에 물려 사경을 헤매는 카말라와 재회한다. 카말라와 자신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카말라는 결국 죽는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 왔다가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아들을 찾아 헤맨다.

세존 고타마는 아들이 태어나자 수행을 가로막는 ‘라후라(방해자)’가 생겼다며 괴로워했다지만 싯다르타에게 아들은 오로지 애착의 대상이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 ‘소년 싯다르타’에 대한 그의 사랑은 끝이 없다. 그만큼 걱정도 한이 없다.

쾌락과 권세의 늪에 빠지지 않을까,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지는 않을까, 속을 태우는 싯다르타에게 바주데바가 충고한다. “물은 물끼리 어울리고 싶어하고, 청춘은 청춘끼리 어울리고 싶어 하는 법이죠.” 아들을 자신의 생각의 울타리에 가두어 두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어버린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강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강에는 삶의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모두 녹아 있다. 강은 일체의 모순과 대립을 끌어안는 하나 됨의 원천이자 생성의 모태다.
 

구도자 헤세의 영적 경험에서 우러난 삶에 대한 통찰
 

‘싯다르타’에는 헤세의 자전적 요소가 다분하다. 헤세는 인도에서 개신교 선교 활동을 한 조부모를 통해 일찍이 동양종교에 눈떴다. 공자, 노자, 역(易), 선(禪) 등 동양사상에도 밝았다. 헤세는 스스로 자처했듯 동양적 구도자요 은둔자였다.

헤세는 ‘인도기행’이라는 책을 냈을 만큼 인도와 친숙했다. 그의 어머니는 인도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가족사적 배경과 지적 이력으로 말미암아 이 소설은 종종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한 불교관을 바탕으로 서구인들에게 피상적인 호기심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굳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 세존이 성도하기 전 걸었던 ‘깨달음의 우회로’를 곡진하게 그려낸 것만으로도 구도소설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헤세 특유의 영적 경험에서 우러난 삶에 대한 통찰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헤세가 1920년 전두동염을 앓을 때 쓴 병상일기를 보면 ‘싯다르타’가 제대로 쓰이지 않아 고심한 대목이 나온다. 고행자로서의 싯다르타를 그릴 때는 순조로웠지만 ‘세속의 싯다르타’를 묘사하려고 하자 글이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종의 ‘글길 막힘(Writer’s Block)’ 현상이다.

미국의 소설가 헨리 밀러는 ‘싯다르타’는 정신적으로 신약성서보다 더 큰 치유력을 지닌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과장의 혐의가 없지 않지만 ‘싯다르타’에 내면의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영적 환기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헤세도 말했듯이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근접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싯다르타의 강’을 떠올리며 고요한 명상에 잠겨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글 김종면 주필 |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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