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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돌아온 배우 정애리 ‘나눔에서 얻는 기쁨’
베트남에서 돌아온 배우 정애리 ‘나눔에서 얻는 기쁨’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7.2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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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는 건 항상 마음이 아픈 일,
그들의 슬픔을 느낄 때면 눈물을 참을 수 없어”

배우 정애리가 4박 5일의 빠듯한 일정을 마치고 베트남에서 돌아왔다. 5년 전부터 시작한 ‘월드비전 친선대사’직을 통해 그이의 발길이 닿은 나라는 한두 군데가 아니다. 몽고의 울란바토르에서 가족을 잃고 도시의 맨홀에서 사는 아이들은 물론, 아프리카의 잠비아와 우간다, 쓰나미로 상처 입은 인도까지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그이는 매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았다.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여러 번. 이미 20년 전부터 국내에 있는 ‘성로원’을 매주 방문하며 나눔을 시작한 그이는 이제 세계 곳곳의 아이들을 품고 있다. 사랑을 나누면서 더 큰 사랑을 깨달았다는 그이의 얼굴에는 천사와 같은 미소가 가득 배어 있었다.

슬픔의 땅, 베트남 흐엉후아에서 만난 사람들
거의 매번 그렇듯, 이번에도 한창 드라마 촬영 중에 떠난 길이었다. 미리 출연 분량을 촬영해야 하는 탓에 출발 당일까지 이어진 강행군이었지만, 비행기에 오르는 그 순간에는 오직 빨리 도착해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첫 방문국인 베트남. 오래전 끝난 전쟁이지만, 미처 처리되지 못한 폭탄의 잔해로 인해 그 후유증은 크고도 긴 슬픔으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저녁 비행기로 출발해 밤 늦게야 도착한 그이는 다시 목적지인 흐엉후아 지역으로 향했다. 베트남에서도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야 하는 외딴 그곳에서 만난 소수민족 아이들은 힘겨운 삶 속에서도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벌써 2백5명의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는 그이. 그러나 그곳에서 또다시 한 명의 아이와 결연을 맺었다. 바로 일곱 살 여자아이 호치메다.
“정말 감사하게도 호치메는 부모님이 있는 아이였어요. 두 오빠와 갓난아기 동생을 데리고 함께 살고 있었죠. 다섯 식구를 부양하는 아버지는 농사일을 돕고 쥐 요리에 쓰이는 산 쥐를 잡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어요. 그렇게 한 달에 잘 벌면 60달러 정도 정도래요. 호치메 가족에게 최대 희망은 밥만 잘 먹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호치메의 가족이 하루에 먹는 밥은 고작 두 끼. 그나마도 소금과 주변에서 뜯은 푸성귀가 반찬의 전부였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최대 관심사인 탓에 호치메를 비롯한 형제들의 교육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 모습을 본 그이는 그 자리에서 호치메의 후원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려운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열한 살 호반반의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끝내 눈물이 고이는 그이. 베트남에서 호반반의 집을 방문했던 그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난 후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밭에서 탄피를 주울 정도로 베트남 전쟁의 잔해는 여전했다. 더구나 그런 전쟁의 잔해물은 최근까지도 땅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고 있는 상황. 할머니의 아들이자 호반반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폭탄 제거작업을 하다가 터진 지뢰로 목숨을 잃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정신질환이 생긴 할머니를 손자인 호반반이 학교까지 그만두며 돌보고 있었어요. 슬픔 때문인지 몰라도 할머니의 첫인상은 사실 좀 무서웠죠. 그런데 앉아 있지 않고 계속 계단 앞에서 경련까지 일으키면서도 서 계신 거예요. 힘들면 잠깐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서서 그 자리에 계시더라고요. 제가 다가가 할머니께 ‘아드님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라며 손을 잡아드렸는데… 전혀 표정이 없던 그분이…(울음) 갑자기 땀을 흘리면서 눈물을 막 흘리시는 거예요.”
할머니는 아들이 죽은 뒤로 몇 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개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상황, 흐려진 정신상태에도 고통을 참아가며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는 할머니 옆에서 그이 역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슬픔이 고스란히 마음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에 등을 주물러드렸어요. 그랬더니 다른 데도 주물러달라면서 그제야 웃으시더라고요. 그렇게 표정이 없으시던 분이… 주무르면서 ‘시원하세요’라고 한국말로 물었는데, 갑자기 ‘어’라고 대답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며 몸을 주물러드렸어요. 신기하게도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대화가 됐던 것 같아요.”
그 외에도 그이가 찾은 곳에서는 언제나 막막한 슬픔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자식을 키우는 엄마이자 한 어머니의 딸로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볼 때면 그이 역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매번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인도에서 쓰나미로 아이를 잃은 엄마와의 만남 역시 그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후 두 아이를 한꺼번에 쓸려 보낸 엄마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엄마는 충격이 너무 커서 사고 이후로 그 바다 근처조차 가지 못했더군요. 저와 만난 날은 용기를 내서 함께 갔어요. 그때 그 엄마가 저한테 ‘Do you have a baby?’라고 물었죠.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탁 먹먹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중독과 같은 나눔의 기쁨
그이는 “나누면서 얻는 사랑은 보너스”라고 했다. 아이가 태어나 자라면서 부모에게 주는 기쁨처럼 그이 역시도 나누면서 얻는 기쁨을 통해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키울 수 있었다. 그러한 보너스는 때로 그이가 베푼 나눔의 몇 배가 되는 기쁨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때로는 도움을 준다는 것이 무작정 쉽지만은 않아요. 받는 사람 입장에서 예상치 못한 반응이 올 경우도 있죠. 아마도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이 피폐하고 힘들어서라고 생각해요. 이면을 보기 시작한 거죠. 그들이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느끼게 되면 더 안타까워져요.”
그이가 처음 나눔의 ‘중독’을 경험한 것은 20년 전 촬영을 위해 우연히 찾은 ‘성로원 아기의 집’에서였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은 너무나 천진난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선 그이는 이후 매주마다 성로원을 찾아 아기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도 모르게 정말 예쁜 아이에게 먼저 눈이 갔어요. 그러면 그 아이는 너무 당연하게 ‘나를 좋아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고 당당하게 손을 벌려 안아달라고 하죠. 그러고 나서야 다른 아이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때 저는 감히 ‘아, 저 아이들도 사랑을 줘야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프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먼저 바라보게 되더군요.”
이십 대부터 시작한 성로원 봉사는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영아원에서 보육시설로 바뀌었지만, 3년 전까지는 일곱 살이 되면 전원을 해야 하는 탓에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명절이 되면 간간이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어 세월을 실감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성로원 아이들이 그이를 부르는 호칭도 다양해졌다. 아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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