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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창작 50년 외길 인생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소리, 그리고 삶
국악 창작 50년 외길 인생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소리, 그리고 삶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1.1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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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할 땐 감정을 빼야 해.
희극배우가 연기할 때 웃지 않아야 남을
웃길 수 있듯이 말이야”

 

도스토예프스키와도 같은 쉬이 다가설 수 없는 장중함, 아울러 손때와도 같은 질박함이 그 한 몸에 공존하는 사람을 좀처럼 본 일이 없다. 마침내 그의 앞에 섰고 숙연해졌고 그래서 한없이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생활의 중심에 경박하게 자리했던 사심들을 조금 덜어냈다고나 할까. 해질 녘 무렵의 적요한 공기 속에서 그의 가야금 소리는 한 치의 미동 없는 꼿꼿함으로 공명(共鳴)하는 중이었다.
2011년 국악 창작 인생 50주년을 맞는 그의 소회가 조금 남달라 보였다. 서정주의 시를 가사로 한 ‘국화 옆에서’, 우리나라 가야금 첫 창작곡인 ‘숲’ 등 수많은 가야금 명곡을 창출해낸 걸출한 예술가로서 그는 한국의 다사다난했던 반평생 역사를 두 눈으로 생생히 목도해온 인물이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오래 역임하며 이 땅의 많은 국악인들을 제 손으로 길러낸 한국 음악의 스승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고나 할까.
평범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는 명언을 읊조리더니 눈빛으로 끝내 사람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고야 마는 그다. ‘평범’이라는 말의 진짜 무게를 아는 비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반평생을 이어온 창작의 열정
2010년 12월 4일, 국악 창작 50년의 외길을 걸어온 황병기 선생을 위한 헌정 공연이 열렸다. 세종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황병기의 소리여행 - 가락, 그리고 이야기’는 각 분야에서 걸출하게 활약하고 있는 쟁쟁한 음악인이자 황병기 선생의 지나온 인생을 경외하는 후배들이 함께 모여 만든 공연이다.
“오래 알고 지냈던 오대환 음향감독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먼저 내게 큰 틀을 보여주며 공연을 같이하자고 제안했지. 각 음악계 후배들이 이번 기획에 흔쾌히 응했고, 소설가 이외수 씨 같은 경우엔 미술을 담당해주었지. 후배들은 모두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황병기 음악 마니아들이야. 나로선 너무나 기쁘고 뿌듯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지.”
국악을 창작한 일로 치자면 50여 년이지만 가야금을 손에 쥔 것은 그보다 더 오래전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 이미 가야금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연주를 해왔던 것.
“10여 년간 혼자 독학하듯 연주 연습을 하다가 불현듯 창작을 해봐야겠단 생각을 했지. 그 시절만 해도 국악계가 완전히 황무지였거든. 작곡 자체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그저 옛날 것을 이어간다는 단순한 전승방식에 불과했던 것이지.”
그의 말에 따르면 전통이라는 것은 비단 옛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 세대에도 새로운 것이 나오고 그다음 세대에도 새로운 것이 나오며 끊임없이 그 새로움을 대물림하는 일이 전통의 참의미라는 것.
“1962년에 작곡을 시작했어. 그때 첫 번째 가야금 창작곡이 바로 ‘숲’이었는데, 그게 이번 헌정 공연에서 일본 기타리스트인 야마시타 상이 연주를 청해서 무대에 올랐지. 선생도 없고 악보도 없었지만 그저 가야금이 좋다는 마음 하나였어. 그 일념 하나로 창작하고 작품을 발표하고 활동한 거야.”
196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연주하는 한국 최초의 해외 국악 공연 기회를 가졌다. 곡을 연주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안무가가 되어 춤을 추고, 그 공연의 소리를 담아 음반으로 냈다. 그의 첫 번째 음반이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나온 것도 사실상 그 때문이라고.
“그때 세계 무대에 처음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지. 현대적 의미에서 가야금 작곡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 나라는 말은 그래서일 거야. 2007년 나의 작품들을 모았던 음반도 영국 아르크라는 음반사에서 먼저 출시되고, 두 달 후 국내에서 그 음반이 ‘달하 노피곰’으로 출시됐어. 해외와 국내에 그렇게 거의 동시에 말이야.”
가슴을 장악한 삶의 운명, 가야금
그가 가야금을 손에서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가야금 소리에 대한 강렬한 애정을 끊임없이 분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부터 일찍이 음악반에서 활동하며 흥미와 적성을 확인하는 데 주력했던 그다.
“국민학교 때 KBS 방송에 출연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독창했던 기억이 나. 합창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음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고 그에 관한 여러 가지 활동을 밥 먹고 잠자듯 수반해왔던 거야.”
본격적으로 가야금을 손에 쥐게 된 계기는 중학교 3학년 때다. 6·25 전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 피난을 다니던 시절, 학교 근처에 사는 가야금 켜는 노인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평생 처음으로 들어본 가야금 소리는 그에게 그 무엇보다 큰 매혹으로 다가왔다. 찰나야말로 운명이 되는 법이라고 했던가.
“1952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부산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되었어. 그 얘길 듣자마자 어린 마음에 기회다 싶었지. 망설이지 않고 그 길로 국악원을 다니며 10여 년을 가야금 공부를 지속했던 거고. 보통은 가야금 소리를 일컬을 때 ‘청아하다’라는 수식을 써. 맑고 우아하다는 뜻인데, 윤선도의 옛 시조에 나온 표현이기도 하고.”
그러나 충만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여 그 열정이 무조건 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공부를 잘하는 수재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전도유망한 엘리트 위치에서 뭇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것도 사실. 당시에는 가야금을 평생의 일로 삼는 것은 당치 않게 여겨졌다고, 그는 그 시대를 가만히 술회한다.
“처음부터 음악은 아무런 목적 없이 배웠어. 기필코 내가 우리나라 음악을 전승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발전시켜야겠다는 식으로 거창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고.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계획이 외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거지. 정말 단순하게 무언가를 오롯이 좋아하는 마음이 결정적인 어떤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던 해 음대에 최초로 국악과가 생겨났고 당시 학장이었던 작곡가 현제명 선생은 그에게 강사를 맡기며 수업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 강사 생활 4년은 훗날 그가 국악과 전임교수 일을 하게 되는 밑바탕, 그 초석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잠시 여러 가지 다른 일들도 했지. 영화사, 출판사, 화학회사 기획 관리 같은 방면에서 말이야. 그럼에도 가야금만큼은 한 번도 손에서 놓은 일이 없었어.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가야금은 만진 거야. 지금 생각해봐도 그게 신기해.”
가야금 관련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것은 1974년,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 되던 해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전임교수로 재직하면서 그의 국악 창작과 연구는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교수의 본업이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자신의 전공분야를 연구하는 그 두 가지라면 그에겐 두 가지 일이 모두 흡족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삶의 정체성은 그때 비로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평소 악상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편이지. 그림을 보다가도 오고 시를 읽다가도 오는 것이지. 예컨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나 ‘추천사’ 같은 시가 내가 작곡한 곡의 가사로 들어간 것도 그런 차원에서의 일이고.”
그중 ‘미궁’이라는 곡은 그의 곡 중 가장 전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사람들 가슴속에 큰 파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0여 년 전 한창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유포된 미궁의 악상에 대해 갖은 루머가 돌 만치 그의 음악은 강렬했다.
“미궁이라고 특별히 내가 더 애지중지하는 것은 아니야. 모든 작품이 내겐 다 똑같거든. 무엇이 더 훌륭하다 더 못하다가 아니라,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것처럼 동등하게 애착이 가고 소중한 거지.”

삶은 재촉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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