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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라는 고난 속에 두 아들 글로벌 리더로 키워낸 강영우 전 미 차관보의 영재 교육법
시각장애라는 고난 속에 두 아들 글로벌 리더로 키워낸 강영우 전 미 차관보의 영재 교육법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6.17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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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우 박사를 만나러 간 곳은 그가 묵고 있는 한 호텔의 객실이었다. 두어 번 노크를 하자 강 박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취재진을 맞았다. 소파 앞 유리테이블 위에는 손때 묻은 휴대용 점자판과 점자가 찍힌 수십 매의 용지가 쌓여 있었다.
강 박사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하다. 중학교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 부모와 누나를 잃고 고아가 됐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고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냈다. 그런 그의 성공 스토리는 미국 사회에서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됐다. 교육 전문가인 강 박사는 두 아들을 글로벌 리더로 양육했다. 첫째 아들인 진석 씨는 세 살 무렵 아빠 눈을 고치겠다는 선명한 비전을 품고 끝없는 도전과 노력으로 안과 전문의가 되었고, 30대 후반에 안과협회 회장이 되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둘째 아들인 진영 씨는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특별보좌관으로 있다. 강 박사는 시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리더로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두 아들도 각각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성장시켜 미국 사람도 부러워하는 명문가를 만들었다. 강 박사는 자신의 성공 스토리와 자녀교육 이야기를 엮어 책 <원동력>을 펴냈다. 책에는 “인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며, 누구나 당대에 명문가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는 강 박사의 교육철학과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맹인재활원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공에 맞아서 망막이 손상됐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음해였죠. 2년가량 입원 치료를 했지만 결국 의료진은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고 했어요. 눈을 뜰 수 없다는 선고를 받게 됐죠. 다음날 어머니에게 ‘제가 장님이 된대요’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때 철이 조금만 더 들었다면 조심스럽게 말했을 텐데, 어머니는 그 말을 들은 지 여덟 시간 만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렇게 양친을 모두 잃게 되었죠.”
꿈 많은 여고시절을 보내야 할 열일곱 살 누나는 남은 세 동생을 돌보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무게였을까. 누나는 공장을 다닌 지 16개월 만에 과로로 쓰러져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연이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후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슬피 울었던 강 박사. 눈이 성했더라면 누나처럼 동생들을 책임지기 위해 생계 전선에 나섰을 테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열세 살 남동생은 철물점 직원으로, 아홉 살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열일곱 살이었던 강 박사는 맹인재활원으로 가게 됐다. 언제나 함께할 줄 알았던 가족과의 이별, 헤어지던 날    3남매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어떤 희망이나 꿈을 꾸기에 당시 강 박사는 너무도 지쳐 있었다. 동생 걱정에 잠 못 이룰 때도 많았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맹인재활원에서 예상치 못한 희망을 발견했다.
“맹인재활원은 무척 따뜻한 곳이었어요. 선생님들도 무척 잘 대해주셨죠. 그곳에서 한글 타자기와 점자를 쓰고 읽는 방법을 배웠어요. 앞을 보지 못해 영영 글을 사용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대단한 희망으로 다가왔죠. 그러던 중 시각장애인으로 영국에서 유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가 된 일본인 이와시 다케오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그때   ‘한국의 이와시 다케오’가 되겠다고 다짐했죠. 시각장애를 겪고 있지만 대학도 가고 유학도 가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사회에 도움이 되겠다는 꿈을 꿨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인생 30년을 내다보는 장기, 중기, 단기의 분명한 비전과 목표를 세웠죠.”
열여덟 살 되던 해 강 박사는 서울맹학교 중등부 1학년에 입학했다. 눈을 고치기 위해 4년여에 걸쳐 전국을 다녔고 맹인재활원에서 1년 정도를 보냈기에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들어간 중학교였지만 누구보다 성실히 공부했다. 강 박사의 단기 비전은 10년 안에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중·고등부 각각 3년에 대학 4년을 합치면 꼭 10년이 된다. 강 박사는 정확히 10년 뒤인 1972년, 연세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대학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로부터 다시 10년간의 중기 비전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장기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회에 유익을 주는 봉사를 하며 사는 것이다.

누나, 동생 하던 사이에서 부부가 된 사연
아내 석은옥 여사와는 단기 비전을 이룰 때 만났다. 당시 아내는 한국걸스카우트본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강 박사는 그곳에서 열리는 시각장애인 프로그램에 참가하려고 왔다. 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며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아내는 프로그램이 끝난 후 소공동에서 광화문까지 강 박사를 바래다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됐다. 마음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은 그날 이후 누나, 동생으로 지내며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강 박사의 책을 읽어주고, 시험도 대필해주면서 연을 쌓아갔다. 숙명여대 영문과를 다녔던 아내는 강 박사를 만나면서 영어교사를 해야겠다는 장래 꿈도 시각장애인 교육으로 바꾸었다.
강 박사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아내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인 1972년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해 결혼에 골인했다. 원래 아내의 본명은 석경숙으로 ‘은옥’이라는 이름은 강 박사가 선물로 만들어준 것이다. “석은옥은 석(石)으로 10년, 돌보다 나은 은(銀)으로 10년, 은보다 귀한 옥(玉)으로 10년을 살게 해주겠다”는 강 박사의 다짐이 담겨 있는 이름으로 아내는 현재 이 이름으로 살고 있다.
결혼 후 강 박사는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내는 남편의 눈, 지팡이 노릇에 짐꾼, 운전기사 역할까지 해야 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자신 하나쯤 버려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 박사는 그런 아내에게 고마움을 숨기지 않는다.
“아내에게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이에요. 아이들이 장성하게 잘 큰 것도 아내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9월쯤 그간 아내의 삶을 담은 수필집이 나온다고 하네요. 아내의 책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웃음).”

두 아들의 성공 원동력은 뚜렷한 목표의식
자랑스러운 두 아들 진석·진영 씨는 강 박사가 유학시절 태어났다. 강 박사는 필립스 아카데미(미국의 가장 오래된 명문 고교)의 건학 이념인 “모든 일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내가 가진 재능을 주위, 사회, 온 세상에 나누어주라”를 자녀 교육 목표로 삼았다.
진석 씨는 세 살 무렵부터 “눈 뜬 아빠를 가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아빠는 운전도, 야구도 못하고 세발자전거 타는 것도 못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의 기도를 듣고 마음속으로 한참을 울었다. 강 박사는 그런 아들에게 다가가 꿈을 심어주었다.
“아이의 기도를 듣고 진석에게 ‘아빠는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가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지만 고칠 수가 없었단다. 그런데 의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으니 네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는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네가 커서 안과의사가 되어 아빠 눈을 고쳐주면 어떻겠니?’라고 물었어요. 그 말을 들은 진석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것 참 멋있겠네. 아빠, 기다려, 내가 의사가 돼서 아빠 눈을 고쳐줄게!’라고 말했죠.”
진석 씨의 그 말은 곧 목표가 되었고 도전과 피땀 흘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생 진영 씨 역시 어린 시절 세웠던 목표가 지금의 자리에 있도록 해주었다. 진영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인생 로드맵을 만드는 과제를 받았다. 65세 은퇴하는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자서전을 써오라는 것이 과제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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