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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꼽힌 안성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꼽힌 안성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8.19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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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이 원하고 무엇보다 관객들이 나를 원할 때까지,
죽는 날까지 영화배우를 하고 싶다”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는 얼굴 위로 잔주름이 물결처럼 번져간다.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 안성기. 그 이름 자체로 ‘한국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배우다. 그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한국영화 100선’ 목록에서 가장 많은 14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1957년 만 5세에 영화 ‘황혼열차’의 아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2008년 ‘신기전’의 세종대왕 역에 이르기까지 52년간 1백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금방 떠오르는 히트작품만 살펴봐도 ‘실미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고래사냥’, ‘바람불어 좋은 날’ 등 수십 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꼽혔다는 사실이 전혀 새롭지가 않다.
인생의 대부분을 영화와 함께한 사람. 잠시 영화를 손 놓았던 20대 무렵의 학창시절마저 마치 연기를 위한 충전기라고 여겨질 만큼 그는 영화에 몰두해왔다. 그의 기나긴 필모그래피를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의 선택은 어째서 오직 ‘영화배우’였을까.

‘한 우물’만 파온 천생 영화배우
안성기는 1980년에 딱 한 번 방송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다. 단막 형사극 시리즈였는데, 친한 선배 PD의 끈질긴 요청에 마지못해 범죄자로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드라마를 찍으면서 그는 방송이 영화와 많이 다르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말한다. 우선 속도부터 달랐다. 단 이틀 만에 50분짜리 드라마를 찍는 속도였는데, 그 정도는 영화라면 두 달 이상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드라마와 인연을 끊었다.
사실 그는 한때 아역배우 경험을 끝으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려고 마음먹은 때도 있었다. 대학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한 그는 졸업 후 학사장교까지 지망했지만 갑작스레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전공도 살릴 길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영화판으로 되돌아갔다. 대학 때 잠시 연극을 하기도 하고, TV의 영향력이 커진 1980년에 한 번 외도를 해보기도 했지만 영화의 마력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영화의 마력이란, 영화는 수없이 많은 NG 속에서 OK를 골라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배우는 NG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연극이나 생방송 같은 무대는 자신의 NG가 결국 실수로 각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또 너무 어릴 적부터 영화라는 메커니즘에 익숙해진 탓일 수도 있겠다.
TV 드라마나 연극무대 역시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배우들도 있고, 심지어 정치인으로 변신했던 한 배우는 “여의도 정치판 역시 무대의 연장선”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안성기는 “영화가 내 체질에 맞고, 내가 즐거운 일”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50여 년에 걸친 ‘한 우물 파기’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이다.
일단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가는 그의 한 우물 속성은 CF나 다른 활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26년간 모 커피광고의 전속모델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91년 시작한 유니세프(UNICEF) 한국위원회 친선대사이자 홍보모델 활동을 18년째 이어오고 있다. 광고는 그렇다 쳐도 보수 없이 활동하는 친선대사 자리를 그토록 오랫동안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국민배우’, ‘한국 영화 최고의 스타’에게 러브콜이 온 곳은 비단 방송계와 연극무대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그를 원한 쪽은 1990년대부터 구애의 손짓을 시작한 정치권이었다. 언젠가부터 정치계가 ‘이미지 정치’를 본격화했고, 그후 적잖은 연예계 인사들이 금배지를 달았다. 또 몇몇 연예인들은 선거활동에서 종종 모습을 비치기도 했다. 한국 연예시장이 커지면서 연예인 출신 장관도 여럿이 배출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이 그를 가만히 놔둘 리 없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의 유혹을 뿌리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여러 곳에서 제의가 왔죠. 그런데 체질적으로 안 맞더라고요. 감투를 쓰려면 견고한 체제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건 너무도 부담스럽고 억지로 떠맡는 일이잖아요.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모든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못하게 되면 제가 불행해질 것 같아요.”
그러나 그를 향한 정치권의 러브콜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제는 거절이 만성이 됐는지, 제의하는 쪽에서도 ‘저 친구는 정말 영화가 좋은가 보다’ 하는 일종의 공감대(?)까지 형성됐을 정도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매력적인 사람, 그리고 배우
안성기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꾸준함’이다. 그는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 영화의 질곡과 변화를 묵묵히 견뎌온 대표적인 배우이다. 특이한 건 그의 영화 대부분은 당대의 트렌드에서 한 걸음 정도 빗겨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에 본격적인 성인 연기자가 됐지만, 당시 대세였던 에로티시즘 영화와는 무관했다. 1990년대에 코미디와 액션과 멜로가 난무할 때, 그는 일본과 폴란드에서 ‘잠자는 남자’와 ‘이방인’을 찍으며 거리를 두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겹치기 출연을 하지 않았고, 한 캐릭터에 정박하는 것을 거부했다. 반어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의 긴 생명력은 이런 ‘비정상적인(?) 행보’도 한몫했다.
이에 더해 티내지 않는 노력과 지독한 자기관리는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어느새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곤 한다. 실제 겉모습에 비치는 그는 40대에 불과해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작 ‘실미도’에서는 그의 탄탄한 몸매가 공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물론 5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 치열한 자기관리 덕분이다. 언젠가 절친한 후배 박중훈은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시작하면서 “선배님은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 너무 좋겠다”고 부러워하다가 몇 달 뒤에 그의 운동량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안성기가 얼마나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인지를 가늠케 하는 일화이다.
그의 긴 생명력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요소를 꼽자면 부담감이다. 7년 전쯤인가, 그가 모 잡지에서 한 말이다. 
“신인이 데뷔해서 몇 작품까지는 하나하나 새로워 보이고 각광받지만 거기서부터 도약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다 보면 중년이 되고 더욱 힘들어지죠. 한국 영화에서는 그런 식으로 계속해나간 선배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제 후배들은 ‘저 선배는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며 절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배우의 정년을 늘려가야 해요.” 
그리고 그는 ‘한국 영화배우 정년’을 계속해서 연장해가고 있다. 데뷔 5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07년, 박중훈과 찍은 ‘라디오 스타’는 그의 반세기 영화인생을 기념하는 축포와도 같은 영화였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안성기를 영화에서 만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그때까지도 정년 연장에 대한 부담감을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린 폴 뉴먼처럼 70세가 넘어도 여전히 매력 있고 영화상 후보에도 오르는 멋진 배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묻는 설문을 다시 한다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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