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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헤어디자이너 1호 유지승 원장 외아들 사망, 공황상태 심경 단독 고백
스타 헤어디자이너 1호 유지승 원장 외아들 사망, 공황상태 심경 단독 고백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7.3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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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남성 헤어디자이너로 주목을 받았던 ‘유지승 뷰티살롱’의 유지승 원장. 헤어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같지 않던 시절, 그리고 남성 헤어디자이너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 그는 도전정신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한때 배우와 의상디자이너의 꿈도 품었던 그가 헤어디자이너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욕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끼와 예술감각으로 그는 금세 미용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미용실에서 일을 한 지 석 달 만에 정식 미용사로 발령을 받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 시작했다. 명동의 한 고급 미용실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딛은 그는 잘생긴 용모에 남다른 감각까지 소문이 나면서 각 미용실 원장들의 스카우트 경쟁에 시달리기도 했다. 꾸준히 경력을 쌓아오다 명동 사보이호텔 옆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헤어숍을 오픈한 이후로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그를 찾았다. 웬만한 스타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찾아오는 그의 헤어숍은 곧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할 정도였지만, 고객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순서를 기다렸다.
언론의 각광을 한몸에 받았던 그는 CF에 출연할 정도로 인기를 얻으며 ‘스타 헤어디자이너’의 시대를 열었다. 굉장한 체력과 정신력을 요하는 일이다 보니 이제 일선에서 은퇴했을 법하지만, 그는 여전히 손에 가위를 들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가위를 들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제 일을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해. 나이도 있고 하니까…. 그런데 그건 아니라고 봐. 내가 할 수 있는 한, 나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 한 항상 맞이할 수 있고, 그 사람들이 원하는 머리스타일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 손님들도 그만큼 나를 믿고 오랫동안 찾아오는 것이니까.”
그의 헤어숍에는 철저한 원칙이 있다. 제품도 자신이 직접 테스트해서 최고의 제품을 쓰고, 머릿결을 상하게 하는 시술은 최소화하는 것. 3대는 기본이고 4대가 이어서 헤어숍을 다니는 고객들에게 하나라도 더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제 나는 뭔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써서 손님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당장 손님들에게는 표가 나지 않겠지만 다른 곳에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못 쓰겠다 할 정도의 비싼 약들도 테스트해서 좋으면 바꿔서 쓰지. 그 재료값이 두 곱, 세 곱 비싸다 해도 그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거든.”
그는 “나이 먹어서 일을 할 수 있는 건 굉장한 행복인 것 같다”라고 털어놓았다. 고객들의 스타일 하나하나를 만들어갈 때의 보람은 처음 일을 시작했던 그때와 다르지 않다.
“나는 손님들이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는 것을 못 봐. 그냥 ‘기르겠느냐, 자르겠느냐’ 딱 하나만 묻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그렇게 다 시켜서 하려면 어디 가도 똑같은데 뭐하러 여기에 오겠어. 스타일을 바꾸러 오는 것 아닌가. 나를 믿고 바꾸라고 하지. 가끔 ‘손님은 왕인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님은 왕인데 미용사는 황제라서 그렇다’라고 해. 내 마음대로 해야 정성이 들어가고, 내 노력이 들어가지. 난 내 마음에 들어야 되거든. 처음에는 맘에 안 들어하던 사람들도 다음 번엔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됐지, 뭐.”
그는 오로지 다른 이들의 머리를 다듬고, 스타일을 만드는 데 평생을 보냈다. 외곬처럼 자신의 길이 아닌 분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50년 가까이 그저 수많은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을 만지는 일에 질리지도 않고 지내왔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분야는 전혀 알려고 안 한다고 했다. 못 하나 박는 일도 전문가가 와서 박아야 한다. 자신이 없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기 때문이다.
“난 운전도 못하고, 사진 찍을 줄도 모르고 오로지 할 줄 아는 것이 이거밖에 없어. 예전 명동 시절에는 돈도 좀 벌었지. 하지만 가끔은 ‘다른 일을 했으면 이렇게 고달프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이건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이 같이 동반되니 쉬운 직업은 아냐. 하지만 이게 내 운명이라면… 할 말이 없을 땐 운명으로 돌리곤 해. 이게 내 운명이라면 할 수 없지. 50년 가까이,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복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 가끔 후배들이 그러지. 이 일을 마흔 살까지만 하고 그만둘까, 쉰 살까지만 할까 고민하다가도 나를 보면 쇼크를 받아서 열심히 한다고.”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다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것이 배우들의 바람이듯, 사람들의 머리를 만지다가 ‘앗’ 하고 쓰러져 죽는 것이 그가 맞고 싶은 마지막 모습일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헤아릴 수 없는 아픔, 상상할 수 없는 슬픔
헤어디자이너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지승 원장이지만, 그는 ‘성공’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 안 해. 지금처럼 남자 헤어디자이너들이 많아지는 데 내가 지렛대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은 있지. 하지만 성공의 잣대를 미용실을 여러 개 하고, 돈을 많이 벌고, 고급차를 타고 그런 부분에 둘 수는 없지.”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한 가족의 희생도 많았다. 명동에서 헤어숍을 하던 시절, 늘 매장 안을 쓸고 닦으면서 청소를 하는 아내를 보고 고객들은 지배인으로 착각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는 “아주머니, 이곳에서 오래 일하시네요. 참 보기 좋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운명이라 믿고 헤어디자이너의 한길을 걸어왔지만,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줄 알기에 자식들에게는 이 힘듦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유지승 원장.
“난 우리 애들에게 미용을 배우라는 말을 빈말이라도 해본 적이 없어. 힘든 것은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부모 마음이잖아. 다들 외국에서 공부했는데, 둘째 딸이 날 도울 생각을 해서 메이크업을 배웠더라고. 지금은 헤어숍에서 메이크업 쪽 일을 맡아서 하고 있어.”
말을 이어가던 그가 기자에게 갑자기 “뭔가 알고 왔지?”라고 물었다. 기자는 그에게 차마 “그렇다”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촉촉이 젖은 눈빛을 확인하곤 기자가 해줄 수 있었던 리액션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그러시나 하는’ 의구심을 품는 것으로 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기자의 마음을 읽어냈다. 하지만 끝까지 아는 척을 않기로 했다. 아는 척을 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 이야기를 구구절절 듣는다고 해서 그의 슬픔이 도저히 거두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묻고, 듣는 일은 ‘잔인함’이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지금은 알고 왔다 해도 그 일을 다시 내가 내 입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아. 이해해줘. 몇 십 년을 살아오면서 참 남의 일로만 생각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고 하니 쉽지가 않아. 살면서 여러 가지 슬픔을 겪을 수 있지만, 어떤 슬픔은 정말 겪지 않아야 돼. 시간이 해결해준다지만, 내 인생에서 시간만으로 치유되지 않는 그런 아픔이 있더라고. 난 그런 것은 내게 일어날 일이 아닌 줄 알았어.”
눈물이 고인 눈으로 기자를 바라보는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아픔,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을 겪은 그의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부모라면 슬프지만 땅속에 묻고, 오래 앓으며 투병생활을 한다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있잖아. 갑자기, 너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겪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그런 아픔을 내가 겪어봤는데… 미안해, 그 얘기는 그만 하자.” 
본지는 익명을 요구한 유 원장과 무척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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