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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의 저력을 증명하다 세계여자의사회차기 회장 선출된 박경아 교수
한국 여성의 저력을 증명하다 세계여자의사회차기 회장 선출된 박경아 교수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11.11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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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박경아 교수. 맑고 분명한 목소리에서 남다른 자신감이 배어난다. 박 교수는 지난 7월 독일 뮌스터에서 열린 세계여자의사회(MWIAㆍMedical Women’s International Association)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차기 회장에 선출됐다. 이는 1987년 한국인 최초로 회장에 선출된 주일억 박사 이후 두 번째 쾌거다. 특히 우리나라는 2013년 총회 개최국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차기 회장 배출과 함께 이룬 또 하나의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지난 4월부터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을 맡고 있던 박 교수이기에 한국 대표로 차기 총회를 준비하는 것과 동시에 세계여자의사회 차기 회장으로서 역할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세계여자의사회는 1919년 미국 뉴욕에서 창설돼 각국의 여의사회 결성을 돕고 여성의 인권 향상을 지원하는 한편 UN 등 국제기구와 함께 어린이와 여성의 건강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기구다. 세계여자의사회 회장직의 특징은 총 9년간 임원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우선 차기 회장에 선출되면 3년간 회장을 보좌하며 활동한 후 정식 회장에 취임해 3년의 임기를 보낸다. 그후에는 다시 3년간 전임 회장의 자격으로 활동하게 된다. 즉, 박 교수가 정식 회장으로 활동하는 시점은 2013년부터가 되는 것이다.
차기 회장직을 수락하며 박 교수의 머릿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세계여자의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 무려 26년. 회장이라는 대임을 맡게 된 기쁨도 있지만, 그간 한국인으로서 세계 각국의 여의사들을 상대로 우리나라를 알려온 지난 시간이 맺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가는 지난 기억의 제일 첫 장을 펼쳐보면 삼십 대의 젊은 나이에 세계여의사회 총회에 참석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명의 약소국에서 시작해 당당히 중요 역할을 담당하는 선도국 지위를 획득하기까지 박 교수의 전방위적 활약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젊은 나이에 임원 자리 오르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어요. 1984년 총회에 처음 참석하게 됐는데, 그다음 총회가 열린 1987년에 주일억 박사님이 차기 회장으로 당선되셨죠. 당시 국력으로는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성과였어요. 그리고 ‘88올림픽’ 직후인 198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여자의사회 총회가 개최됐어요. 당시 서울 총회는 역대 총회 중 가장 잘 치른 대회 중 하나로 꼽히고 있죠. 그 이후 한국의 위상도 올라갔고 우리나라 국력도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어요.”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박 교수는 “현재 세계여자의사회에서 역동적이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나라로 한국의 위상은 대단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시작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매번 총회 때마다 개최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여성 의사들이 참여하며 입지를 넓혀나갔다. 또 총회 기간 동안 적극적인 발표와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며 한국을 알리는 데 노력을 다했다. 즉 지금의 성과는 박 교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노력과 아이디어를 쏟아붓고 공을 들인 결과인 셈이다.
처음 참가한 1984년 총회 당시 박 교수는 64명의 우리나라 참가자 중 가장 젊은 나이로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세계여성의사회 내에 창설된 영포럼의 첫 한국 대표 자격이었다.
“세계여자의사회는 주로 나이 든 분들의 모임이었어요. 젊은 의사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참석을 못하죠. 그런 상황에서 젊은 사람들을 뽑아 국제적인 리더로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 영포럼이었죠. 각국에서 모인 영포럼 대표들이 처음 하는 일은 기념품을 팔아 기금을 모으는 것이었어요. 각자 자기 나라에서 가지고 온 특산물 같은 것을 모아 팔고 기부하는 식이었죠.”
기념품을 팔아 기금을 모으는 데 있어 박 교수의 활약은 당시 임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영포럼 대표마다 100장씩 할당된 래플(경품 뽑기) 티켓을 순식간에 팔아버린 것. 박 교수의 남다른 수완을 눈여겨본 당시 캐나다 출신 회장은 다음 총회에서 그이를 기금모금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이로서는 뜻밖의 기회가 된 것은 물론이다.
“굉장히 영예로운 일이었죠. 사실은 당시 총회에 참석한 우리 측 선생님들에게 두 장씩 나눠드리고 무조건 ‘2달러씩 내세요’라고 해서 가능했어요(웃음). 우연일 수도 있고 운이라고도 할 수 있죠. 위원장이 되면 매년 독일에서 열리는 임원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3년을 기금모금위원장을 맡고 우리나라에서 열린 1989년 총회 때도 여자의사회 로고를 넣은 기념품을 팔아 기금을 마련했어요.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고 회의를 위해 기여한다는 보람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러면서 다른 나라 회원들과 친구도 됐고요.”

의료 외교관으로서 돋보인 재능
세계여자의사회에서 박 교수는 ‘사업을 잘하는 사람’으로 주목받아왔다. 그러나 사실 그이는 물건을 팔고 기금을 모으는 재미보다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이와 친분 있는 세계의 여성 의사들은 점점 많아졌고, 해야 할 일 역시 늘어났다. 이후 1992년 재정위원, 2004년 서태지역 여의사회 부회장을 역임한 그이는 여의사들 모임 속에서 충분히 외교관이라 불릴 만한 역할을 해왔다.  
그 사이 그이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여의사회 참가자들은 세계여자의사회 내에서 매번 총회 때마다 기대감을 갖게 할 정도의 연구 발표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역시 ‘한국’이란 나라의 이미지를 가장 강력하게 심어놓은 것은 2001년 호주 시드니 총회 당시였다.
“총회가 열리면 각국에서 대표들이 나와 장기대회를 하거든요. 그런데 호주 사람들이 그렇게 손님대접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사전에 주최측에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냐고 물어보니 역시 생각대로더군요. 말이 장기대회지 몇몇이 나와서 노래 정도 하는 식이었어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좀 달라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부채춤으로 하는 댄스 퍼포먼스였어요. 열두 명의 여의사를 모아서 석 달 동안 맹연습을 시켰죠.”
부채춤 이벤트를 선보인 날은 그야말로 ‘한국의 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공연이 끝난 후 각국의 여의사들은 특별한 호기심을 보이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외국 친구들이 부채를 뺏어 가지고 가서 자기들끼리 해보고 족두리도 써보고 하면서 너무 즐거워하더군요(웃음). 저희 이벤트로 분위기가 너무 좋아진 거예요. 다 같이 꼬리를 물고 기차놀이하듯 파티장 전체를 빙빙 돌아다니며 춤추고 화합하는 시간이 됐죠. 그 이후부터 매번 총회 때면 댄스 퍼포먼스가 없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아요. 세계여자의사회에서 한국이 열정적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죠(웃음).”

멘토이자 스승인 어머니
박 교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병리학자 박정규 선생이다. 또한 한국 최초 여성 해부학자인 나복영 교수는 그이의 어머니다. 혼란한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이에게 어머니는 거대한 버팀목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전쟁통에 어머니는 그이를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 다행히 의사라는 직업 덕분에 일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전쟁 상황에서도 후진을 양성하며 우리나라 현대 의학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어머니는 당시 전시연합대학 교수로 재직하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저에게는 멘토이자 롤모델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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