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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원더스 허민 구단주의 꿈과 도전
고양원더스 허민 구단주의 꿈과 도전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4.03.04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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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리그 야구선수 된 ‘1조 자산’ 청년 재벌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리그 구단주이자 소셜커머스와 모바일 중고장터, 게임 개발사 에이스톰 등 총 10개의 자회사를 가진 허민 대표의 미국 독립리그 진출 소식이 화제다. 허 대표는 8년간 익혀온 너클볼을 앞세워 미국 독립리그에 소속된 록랜드 볼더스에 투수로 전격 합류했다. ‘포기의 반대말은 도전’이라는 허 구단주의 인생에 또 한 번의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순간이었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제공 고양원더스, 일구회

▲ 허민 일구회 제공
37세 한국인 투수가 미국 독립리그 중 하나인 캔암리그 경기에 등판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동양인 투수를 보기 위해 평소보다 2배 정도 많은 관중이 몰릴 정도로 미국 현지의 관심도 뜨거웠다. 구속은 80km/s로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예측 불가능한 공의 움직임을 지닌 너클볼은 기대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제구력이 문제였다. 선두타자에게 볼넷을 허용한 이후 안타와 도루, 몸에 맞는 공, 2루타를 연달아 내주면서 3실점했다. 2회에는 세 타자를 모두 범타 처리하며 안정적인 투구를 보여주는 듯했지만, 3회에 2점 홈런을 맞고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강판당했다. 3이닝 동안 19타자를 상대하며 홈런 1개를 포함, 5안타와 사사구 6개로 5실점한 것이 37세 한국인 투수의 공식 기록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허민 구단주다. 허 구단주는 야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 하나로 17년간 투구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국 메이저리그 싱글A 수준의 독립리그 선발 투수로 당당히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굳이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더라도 탄탄대로의 삶이 보장된 ‘청년 거부’지만, 인생에서 도전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유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허 구단주. 그의 인생을 통해 많은 이들이 그간 잊고 있었던 도전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선수 출신 부친으로부터 야구 열정을 이어받다

허 구단주의 부친은 부산중학교와 부산고등학교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 영향을 받아 허 구단주 역시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무리한 연습으로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야구를 향한 꿈을 잠시 접어둬야 했다. 그는 1995년 서울대학교 공대 화학공학과(현 응용화학부)에 입학해 그 당시 창단한 서울대학교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대 야구부 내부에서는 유망주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어깨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포기하기까지 아마추어 야구선수로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특히 그는 서울대학교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을 만큼 학교생활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인 인물로 알려졌다.
대학교 졸업 이후 그는 친구 다섯 명과 함께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업 적자가 계속되면서 28세 무렵에는 부채가 무려 30억원에 이를 만큼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사업가로서의 반전은 2005년 출시한 온라인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대성공으로 이뤄졌다. 성공한 기업가 반열에 오르자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부를 쌓기 시작했고, 2006년과 2008년 자신이 운영해 오던 네오플의 지분을 NHN과 넥슨에 넘겨 수천억원대의 ‘청년 거부’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의 이색 행보는 게임업체를 매각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돌연 미국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는 미국 유학생활 중 틈틈이 ‘원조 너클볼러’로 잘 알려진 메이저리그 전설의 투수 필 니클로에게 너클볼을 직접 배우며,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야구를 향한 열정을 행동으로 옮겨 나갔다. 이처럼 그는 구속이 느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너클볼을 8년간 연마했고, 야구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상당한 수준의 너클볼러가 될 수 있었다.

야구 사랑의 결정체 독립야구단 ‘고양원더스’

2010년 소셜커머스 업체인 ‘위메이크프라이스’를 설립한 그는 사업가로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다. 그 이듬해에는 사업을 시작할 때 목표 중 하나였던 구단주가 되기 위한 꿈도 이뤘다. 2008년 한 차례 구단주의 꿈이 무산된 바 있었던 그가 2011년 9월 한국야구위원회와 고양원더스 창단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비록 프로야구 2군에 속한 독립야구단이었지만 실패에 맞선 도전을 중요시하는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구단주의 꿈을 이룸과 동시에, 꿈의 프로리그 무대를 밟기 위해 도전하는 선수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아무리 1조원에 가까운 자산가라 해도 기업가로서 구단 운영에 연간 50억원을 투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야구에 대한 진짜 사랑과 야구인에 대한 존중 없이는 불가능한 결정이라고 평가했을 만큼 야구를 대하는 그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고양원더스는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창단 이후 지금까지 2군 리그에서 50%대의 승률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고양원더스는 프로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으면 무조건 ‘이적 수용’이라는 파격 조건을 내건 팀이다. 이는 허민 구단주의 생각이 반영된 팀 운영 방침이었다. 그 덕분에 고양원더스는 작년까지 총 5명의 프로선수를 탄생시킨 데 이어, 올해에도 ‘1군 진출’ 사례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에는 일구회 시상식에서 일구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고양원더스 구단주로 한 편에서는 구단 경영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김성근 감독으로부터 틈틈이 야구 수업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비밀리에 독립리그 진출을 타진하고 있던 그는 미국 진출 임박을 앞두고 자신의 약점으로 지적됐던 주자 견제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내 인생 남은 날을 위해 오늘을 기억할 것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돼 기쁘다.”
이는 지난 8월 29일 락랜드 볼더스 입단식에서 그가 한 말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에서도 주목한 ‘깜짝 입단식’을 치른 지 4일 만에 그는 홈경기에 선발로 등판했다. 비록 경기에 등판해 패전 투수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경기에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5천여 명의 구름 관중이 몰린 것만 봐도 현지 반응이 대단히 뜨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경기를 마친 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 인생의 나머지 날들을 위해 오늘을 기억할 것”이라는 감명 깊은 소감을 남겼다.
물론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즌 마감을 앞둔 리그 일정 가운데 1~2경기 정도 다시 마운드에 올라 ‘실력 점검’을 받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만약 첫 경기와 달리 안정적인 투구를 보여준다면 내년에는 리그 ‘풀타임’ 출전도 가능하다는 게 록랜드 볼더스 측의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는 정식 비자를 받아 3년간 미국에서의 선수 생활이 가능한 상태다.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미국 독립리그 경기장으로 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도전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성공을 향해 전력 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양원더스 허민 구단주의 인생을 보면 성패를 벗어나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즐길 때 도전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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