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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원'으로 돌아온 이준익 감독
영화 '소원'으로 돌아온 이준익 감독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5.03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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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처벌보다 중요한 우리 이웃들의 치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상업영화 은퇴를 선언했던 이준익 감독이 2년여 만에 다시 메가폰을 꺼내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끔찍한 아동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사건 그 이후, 피해자들이 겪어야 할 치유의 과정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도 인터뷰 내내 티끌만한 불손함 없이 오로지 ‘전달자’의 역할에만 충실했다고 강조했다. 진심이 통한 것일까. 그가 건네는 한 편의 동화에 많은 관객들이 울고 웃는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예술가는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생기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등 다양한 창작 활동으로 대중과 소통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처럼 순수와 상업의 경계를 막론하고 누군가 만들어낸 창작품은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메시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준익 감독이 돌아온 이유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 들고 나온 이야기만큼은 영화의 흥행을 차치하고라도,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접했으면 하는 절박함까지 엿보였다. 하지만 그는 피해자들의 아픈 기억을 들춰내기보다 그들 스스로 어렵게 발견한 마법 같은 시간의 흐름에 주목했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말처럼 사건 이후 가족들은 피해자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 다시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아픔을 묻어둔 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냈다. 이번 영화를 통해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현실의 잔혹함과 냉혹함이 아니라,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소박한 꿈과 가을 햇살같이 따뜻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소재보다 주제에 집중해 전달자 역할에 주력

그동안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기획 및 제작은 물론, 각본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왔다. 이번 작품은 과중한 역할에서 벗어나 그가 온전히 감독의 역할에만 집중했던 첫 번째 영화다. 물론 실제 벌어졌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의 특성상 소재가 주는 불편함과 거부감으로 인해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지혜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읽으며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원작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주제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이자 감독으로서의 창작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그는 비로소 영화에 대한 큰 밑그림을 하나둘씩 그려나갔다.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사회를 고발하기보다 치유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심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빅 피시>라는 영화를 보면 아버지가 거짓말쟁이 혹은 사기꾼으로 비쳐져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해준 동화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큰 물고기를 잡았다는 무용담이었죠. 아들이 조금 성장하자 아버지를 순 거짓말쟁이로 여기기 시작해요. 하지만 아들이 집을 떠나서 먼 길을 돌아와 다시 아버지를 보며 ‘왜 나는 아버지처럼 동화같이 살지 못했을까’하고 후회를 하게 되죠. 이처럼 현실에서 사라진 동화를 영화 속에서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영화는 어차피 현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꿈의 공장이라고 봐요. 현실을 모티브로 하지만 내 영화의 주제는 항상 꿈의 공장이고 싶어요. 정말 치유할 수 없는 끔찍한 상처를 담은 가족, 관계 그리고 그 현실을 뛰어넘는 바람에는 동화가 필요해요. 죽는 그날까지 아버지와 딸 사이에 동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아 찍는 내내 판타지 혹
은 동화로 주제를 이야기하려고 했죠.”
이야기에서 묻어나오는 시나리오 작가의 진정성은 영화감독의 자의식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는 이번 영화의 원작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좋은 전달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여자의 심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진심은 남자 감독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애틋하고 순수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에 반영된 작가의 진심이 저에게 큰 울림을 줘서 감독이라는 자의식을 버려 버리고 작가의 진심을 온전하게 운반만 해도 다행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건의 속성이 너무나 거북한 부분이 있는 만큼, 여자의 심정으로 그 사건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담은 시나리오를 남자 감독이 훼손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실제로 그는 피해자 가족을 만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자리에서도 피해자 가족과 만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그 이야기들이 모여 일종의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될 여지를 남기는 것조차 불손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분들과 만난 이야기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 이야기가 마케팅 아이템처럼 쓰인다면, 그것도 불손한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분들은 훨씬 지혜롭고 훌륭한 분들이시고,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고 좋아하셨다는 정도만 말씀드릴게요. 자꾸 이 영화를 통해 불편한 키워드들이 나오는 것은 결국에는 피해자에게도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이 영화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하는 소재의 선입견에 가둬버리는 것이어서 가급적 영화 주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해요.”

촬영 현장에서 감정의 과잉을 경계했던 이유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그가 배우와 스태프들과 다짐한 것이 있다. 바로 촬영 현장에서 눈물 흘리거나 아파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영화 촬영 기간 동안 배역에 몰입해 있어야 하는 배우들 역시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감독으로서 최대한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 하는 그조차 극 상황에 몰입해 적지 않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슬퍼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의도한 바는 분명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픈 사람은 여자 주인공인 소원이에요. 실제 상황은 아니지만 소원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아파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건 정말 미안한 일이죠. 저나 배우, 스태프들이 실제로 많은 눈물을 참아가며 촬영에 임해야 했어요.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우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아요. 가장 아픈 사람은 바로 아이인데, 어른이 울고 있으면 진짜 미안한 일이거든요. 아이를 대신해 아파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웃으려고 노력해야죠. 아마 관객들은 눈물을 머금고 있지만 쉽게 흘리지 않는 배우들
의 모습을 보며 더 슬퍼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의 말처럼 영화는 의외로 미소 짓게 만든다. 코미디 영화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느낌보다 가슴 따뜻해지는 훈훈한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번지는 미소에 가깝다. 그가 의도적으로 관객들을 웃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되는 순간, 누구나 옅은 미소를 띠며 영화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이러한 감정에 대해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복합적인 느낌일 것 같다”고 말했다.
“극중 인물들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가진 표현이 많다 보니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대놓고 웃기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웃겨서 웃는 게 아니죠. 그 상황이 다행이고 행복해서 나오는 미소나 웃으려고 준비하지 않았는데 슬쩍 삐져나오는 웃음 정도예요.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인 셈이죠.”
그는 이번 영화의 핵심 인물로 세 명의 배우를 기용했다. 아버지 역을 맡은 설경구와 어머니 역을 맡은 엄지원, 그리고 소원 역을 맡은 신인 아역배우 이레다. 촬영 현장에서 누구보다 배우에게 맞추는 감독이라고는 하지만 위험 요소가 적지 않았다. 설경구, 엄지원과는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본 것이고, 이레는 실전 연기경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연기경험이 없던 이레는 오히려 계산된 행동이 아닌 감정 그대로 움직여줬고, 두 베테랑 연기자는 아역 배우의 감정과 움직임에 반응할 뿐이었다. 실제 아이를 둔 부모처럼 두 베테랑 연기자의 시선은 오로지 이레에게 향해 있었던 것이다.
“배우들이 호흡을 맞춘다는 느낌보다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면 되는 분위기였어요. 설경구 씨와 엄지원 씨가 영화의 주인공인 소원이, 그 자체로 아역 배우를 대상화시켜 보려는 시선이 있었죠. 그러니까 두 베테랑 배우가 굳이 호흡을 맞출 필요가 없었어요. 아역 배우의 연기에 반응만 하면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올 수 있었으니 말이죠. 영화를 보신 관객들이 이레 양이 연기를 잘한 것 같다고 평하시는데, 사실 연기를 했다기보다 그 아이가 제대로 느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아요. 계산을 해서 정확하게 맞힌 듯한 느낌이 있어야 연기를 잘했다는 표현이 맞는데, 이레 양은 아이가 갖고 있는 천진함을 바탕으로 영화 속 상황에 가식 없이 반응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오로지 흥행만을 위해 만든 상업영화 아니다

그동안 그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영화 흥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영화 흥행이 기대에 못 미치자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은퇴를 암시하는 글을 올려 화제를 낳은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만큼은 영화 흥행에 대한 욕심을 조금은 내려놓은 듯했다. 실제로 그는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설명하며 이야기 구조 자체가 상업영화의 요소를 따르지 않았다고 했다.
“보통 시나리오를 보면 8개의 시퀀스에 7개의 사건이 배열되어 있어요. 처음에 사건을 배열하고 그 다음에 더 큰 사건이 나와서 꼬리를 물고 극 전개가 점입가경을 이루다 막판에 강 펀치를 날려야 되거든요. 이 구조가 보통 상업영화의 드라마 툴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사건은 단 하나고, 나머지는 다 사연으로 채워져 있어요. 이야기 구조 자체가 비상업적인 시나리오인 셈이죠. 하지만 유명 배우가 나오고 멀티플렉스 극장을 통해 상업영화 패턴으로 배급을 하니까 상업영화로 소비되는 것뿐이에요.”
그가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배려와 관심, 그리고 응원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아동 성폭행 사건을 대하는 우리들의 시선이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에만 모아져 있는 사이, 정작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피해자 가족들은 철저히 외면당해 왔기 때문이다.
“아동 성폭행과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모두가 똑같은 마음이 됩니다. 피의자를 사형시켜야 한다느니, 광화문에서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며 거친 반응을 쏟아내죠. 그 뉴스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요. 그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사건을 잊어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자꾸 그 사건을 도마 위에 올리면 그들에게 심리적으로 2차, 3차 피해를 준다는 막연한 예단으로 오히려 외면하고 회피하는 게 정당한 것처럼 생각해요. 그래서 이 영화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처벌의 엄중함을 이야기하지만 강하게 강요하지는 않아요. 더 크게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피해자의 내일이죠. 자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는지 우리가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죠. 그렇다고 동정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봉사와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오로지 배려와 응원만 해줘도 그들은 덜 외로울 것 같다는 거죠.”

극장가가 아닌 명절 특선 영화로 더욱 빛나는 국민 감독

달변가인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40여 분간 주어진 인터뷰 시간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쪼개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려야 했다. 평소 그에게 궁금했던 한 가지.
그간 많은 작품을 통해 만난 배우 중 누구와 가장 호흡이 잘 맞았을까? 알려진 대로 그는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관철시키는 독불장군형 감독이 아닌, 철저하게 배우에게 자신을 맞추는 편안한 감독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어 콕 집어 한 명의 배우를 선택하지는 못했다.
“그동안 함께했던 배우들과 다 잘 맞는 편이었어요. 무조건 제가 다 맞추기 때문이기도 하죠. 사실 저 편하자고 그러는 거예요. 배우와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기가 두 배로 힘들 수밖에 없죠. 제가 못되게 굴면 두 배로 앙갚음을 당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감독과 배우가 동시대에 사는 영화판의 동료인데, 그 배우랑 언제 다시 영화할지 모르는 거예요. 또 영화는 제가 죽어도 남아 있는 하나의 역사적 창작물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한순간에 배우랑 안 맞는 게 있어서 그것이 작품성을 해한다면 제 손해일 수밖에 없어요. 배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운 대로, 헐렁하면 헐렁한 대로 배우의 스타일에 맞추는 편이죠.”
앞으로 그가 호흡을 맞추고 싶은 배우는 박해일이라고 한다.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함께 작업한 촬영감독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고. 그가 다음 작품으로 어떤 장르를 선택할지 모르지만 박해일이라는 걸출한 배우와 함께하고 싶다는 의향만은 분명해 보였다.
“사실 모든 배우와 다 해보고 싶지만,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죠. 이번 영화의 촬영감독과 처음으로 작품을 같이 했는데, 첫 작품 치고는 매우 잘 맞았어요. 그 촬영감독이 영화 <은교>를 찍기도 했는데, 저한테 ‘박해일이랑 작품하면 기가 막히게 어울리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감독의 말처럼 다음에는 박해일 씨와 작품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국민 감독이라고 칭한다. 영화 <왕의 남자>가 1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얻은 수식어지만 그 이후 그는 이렇다 할 흥행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재밌는 해석을 내놨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라디오 스타>가 대단히 흥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185만 명이 전부예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텔레비전에서 수년째 명절 특선 영화로 방영해주기 때문이에요. 케이블 TV를 포함하면 어떨 때는 하루에 서너 번씩 편성된 적도 있죠. 영화라는 것이 경제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있는데, 관객 수가 경제적인 가치고 영화 이야기는 문화적 가치에 속해요. 물론 감독 입장에서는 영화가 흥행하면 감사한 일이지만, 국민들이 기억하는 건 영화의 내용, 즉 문화적 가치죠. 아마 그래서 극장가에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국민 감독으로 불리는지도
모르겠어요(하하).”
2년 만에 돌아온 그의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듯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반대로 무엇을 해서는 안 될지도 정해놓고 사는 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정처 없는 인생길을 따라 오늘도 내일도 영화판을 기웃거리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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