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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악의 정수, 편경(編磬)
궁중음악의 정수, 편경(編磬)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11.25 2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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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선용(문화칼럼니스트sunny658@hanmail.net) 사진 국립국악원 제공

종묘제례악 같은 궁중음악을 연주할 때 무대 양쪽의 좌우 뒷자리에서 위풍당당하게 연주되는 악기가 바로 편경과 편종이다. 편경과 편종은 고려시대 이후 궁중의 제사와 연향에 사용됐던 대표적인 궁중 악기다. 재료에 따른 분류로 보면, 돌로 만드는 악기는 편경이고, 쇠로 만드는 악기는 편종이다. 우리 국악이 제 모습을 갖추고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게 된 데는 세종대왕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의 덕분이다.

편경, 돌이 중요하다

시원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나는 편경은 그 재료인 특수한 돌, 경석(磬石)을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엔 경석을 구하지 못해 흙을 구운 기와 형태의 편경을 사용했다. 몇 번 타격하면 깨지는 단점을 지닌 그 당시의 편경은 맥놀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세종 대에 우연히 경기도 남양 부근에서 경석을 발견하여, 세종 8년에 편경을 우리가 자체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던 편경을 우리가 직접 만들어 명실상부한 궁중음악의 완벽한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당시 기록에는 세종대왕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하늘도 감동하여 돌이 사람들 눈에 띄게 되었다고 한다.
편경은 음 높낮이의 순서대로, 한 단에 8개씩 두 단에 걸쳐 16개의 경석이 각각 매달려 있다. 우선, 기역자(ㄱ) 형태의 경석을 30mm 두께의 기본형으로 자른 다음, 거울처럼 광이 나게 연마한다. 각 경석의 두께를 달리 만든 후, 바로 끝 부분을 쇠뿔 망치(각퇴)로 타격하여 소리를 낸다. 청음의 섬세함에 대한 세종대왕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우리의 편경을 세종 앞에서 시연 행사하던 중 세종이 어떤 하나의 편경의 소리가 맞지 않음을 지적했다. 이에 제작자가 그 편경을 자세히 살펴보니 한 부분에 깎아야 하는 먹줄의 표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즉, 덜 깎아서 음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세종은 음악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어 신하들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박연뿐만 아니라 맹사성은 편경을 만드는 데 일조한 문신으로 지금도 맹사성의 이름을 딴 국악 경연대회가 개최된다.

다른 악기의 기준 음이 되는 편경

편경은 외부 환경(기온, 습도)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덜 받기에 다른 모든 악기의 음을 조율할 때 편경에 맞춘다. 편경은 한번 제작하기 어려우므로 그만큼 보관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장악원의 악사는 편경의 훼손을 막기 위해 편경을 해체하여 우물에 담가 보관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편경의 파손을 막았다. 후에 그 악사는 편경의 보관에 애쓴 공로로 왕(선조)으로부터 치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지난 여름엔 편경 악기장 김현곤 선생이 국립국악원에서 편경 제작을 시연했다. 편경은 워낙 제작비가 비싸다보니 1년에 1세트(16개) 제작도 어렵다고 한다. 편경 악기장이 경석을 구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다가 남양의 광산 주인에게서 편경 제작을 위한 채굴을 어렵게 허락받은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편경은 잘못 깎으면 귀한 돌을 못 쓰기 때문에 가장 높은 음에서 차츰 저음으로 깎는다. 가장 높은 음은 두께가 6.5-6.8mm이며, 가장 낮은 음은 두께가 26-27mm에 이른다. 편경은 그 면을 거울처럼 윤이 나게 광을 내야 하며, 제작 중 조그만 흠이라도 생기면 이후엔 연주를 몇 차례 더 못하고 깨져서 못 쓰게 된다. 편경 제작이야말로 국악기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고단한 일인 3D 업종인 것이다. 국립국악원 안에 있는 악기 박물관을 찾아가면 편경의 실제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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