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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문학관 강인숙관장-이어령 전장관의 부인으로, 교수로, 작가로 살아온 이야기
영인문학관 강인숙관장-이어령 전장관의 부인으로, 교수로, 작가로 살아온 이야기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12.01 0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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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은이 만난 Queen ③

젊은 날의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를 극복하고,
한국 문학과 한국 작가들의 아이텐티티를 찾아가는

영인문학관 강인숙관장

 
강인숙 씨는 이 시대의 지성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을 남편으로 두었으며, 전 건국대학교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이고,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으로 누구보다 당당하고 활발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다. 마치 행운의 여신이 환한 미소를 지은 듯한 강인숙 씨는, 최근 출간한 가족사적 수필집인 ‘셋째 딸 이야기’를 통해 친정가족이 당한 끔찍한 시대적 수난과 고통을 밝혀 숨겨져 있던 생의 일면을 보여준 적이 있다.
더구나 그녀는 딸 이민아와 손자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냄으로써 직계 가족에게 들이닥친 비극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만 했던 어머니이자 할머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없는 위기를 극복해가면서 한국문학의 아이덴티티를 위해 누구보다 주변을 챙기고 동분서주하는 우리 시대의 빛나는 퀸이다.
김다은 교수가 인터뷰를 위해 종로구 평창동 언덕의 영인문학관을 찾았다.

글 김다은 교수 | 사진 양우영 기자

김다은(이하 김) 젊은 날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를 겪었다고 당신의 저서에서 읽었다. 고향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강인숙(이하 강) 진주가 고향이던 선조가 함경도 영달진으로 귀양을 가서 살았다. 깊은 산속이라 호랑이 때문에 담을 쌓아야 해서 담안이라 부르던 곳이다. 몇 세대가 그곳에 살다가 해방 후 남쪽으로 돌아오는데 산이 너무 험준해 주저앉은 곳이 이원(利原)골이다. 내려오면서 머물기를 반복하다보니 결국 200년 동안 고향 없이 떠도는 유목민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자매들이 쉽사리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역마살이 이미 유전자로 자리를 잡았다고나 할까.

김 셋째 딸이었기에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가 생겼다고 적었는데, 가족은 어떤 상황이었나?
강 아버지는 3·1운동으로 옥살이를 했고, 오빠는 재학 중에 학도징용에 징발되어 제철공장에 끌려가 막노동을 하다가 전신신경통에 걸렸다. 큰언니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본 적도 없는 남자와 결혼했고, 남동생은 폐렴으로 저승으로 갔고, 여동생은 녹내장에 걸려서 아직도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산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본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 가족 이야기는 한 세기의 한국의 역사와 사회의 수난이 그대로 가족의 피로 이어진 경우이다. 나는 남존여비의 시대에 딸 많은 집 셋째 딸, 저주스런 순위로 태어났다. 아래위로 치여 어머니를 전혀 독점하지 못해서인지 항상 허기를 느꼈다.

김 대하소설을 듣는 기분이다. 한 인간이 역사적 존재인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의 절정은 어디였나
강 집안의 어른들이 대대로 훈장을 했기에 나도 교수가 되길 원했다. 그런데 남자들이 스크럼을 짜고 절대적으로 ‘여자’를 배척했다. 실력과 상관없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없으니 정체성의 위기가 심해졌다. 남자들은 나에게 “너는 밥 먹여 주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계속했는데  밥그릇은 항상 남자가 차지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대학원은 다른 학교를 선택하게 되었고, 여자가 차별받지 않도록 딸도 이화여대로 보냈다.

 
김 이어령 선생을 만나서 살면서 부부간의 위기로 이어졌는가? 두 분이 했던 달달한 연애 이야기 그리고 프로포즈 받은 이야기부터 시작해달라.
강 대학교 신입 동기였다. 같은 ‘현대문학분과’에 있었다. 다방에 앉아서 같이 아르바이트하면서 친해졌다. 일본어로 된 문예사전을 번역하는데 서로 단어를 맞추기 위해 이마를 맞대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 세계 문인의 이력을 써야 하는 작업이어서 공부도 많이 하면서 저절로 연애도 하게 됐다. 매일 만나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 어머니가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당시 26살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었다. 이어령 씨는 “너무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서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다방이나 식당에 돈 뿌리고 다니느니 차라리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결혼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방 하나를 얻어서 결혼했다. 어머니는 결혼 어드바이스로 “한 대 맞더라도 박력 있는 사람을 고르라”고 하셨다. 이어령 선생이 아주 박력 있었다. 헤어지기에는 너무 가까워져서 결혼했다. 프러포즈도 받은 것 같지 않은데 결혼은 했네.

김 박력 있는 이어령 선생에게 한 대 맞은 적이 있나? 이어령 선생의 장점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까, 흉이 있으면 살짝 보여 달라.
강 보통 때리는 것은 집안 내력이다. 아버지가 때리는 습성이 있으면 아들도 때린다. 이어령 선생은 충정도 양반이지 않나. 더구나 아픈 데를 건드려야 맞는 것인데, 맞은 적은 없다. 이어령 선생은 너무 젠틀해서…… 현실 타개가 안 될 정도이다. 흉이라면 어질러 놓고 잘 치우지 않으신다. 그리고 지극한 페시미스트여서 걱정이 많은 편이다. 이어령 선생은 끊임없이 새것을 좋아하는데, 집안이 충청도여서 다행히 보수적이다. 새것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옛것과 균형을 이룬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가 어떻게 회복되었나
강 나에게 아이텐티티 크라이시스를 야기했던 조건들이 역으로 나를 회복시켜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외딸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면 지금 꼴불견의 공주병 환자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절대적이다시피 한 배타적인 남자 위주의 직장에서 혼자 버틴 것이나 백 명이 넘는 시댁 식구들과 마찰이 없었던 것도 어릴 때 부대끼며 모서리가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래위로 나를 건드리던 형제들은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자 친구가 되었다. 버팀목인 형제들 속에서 제왕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가난했던 남편과 함께 살다가 그후 누릴 수 있었던 아름다운 기억들, 가령 문화부장관 하실 때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살풀이춤을 추면서 천을 가르며 나오는 행사를 한 것과 국립국어연구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드시는 모습은 나에게 더 큰 기쁨을 주었다. 불리했던 것들이 모두 덕이 된 셈이다.

김 평론가, 교수, 관장이라는 타이틀 중에 당신의 정체성에 가장 가까운 것은
강 세 가지가 같은 것이지만, 교수가 우선 순위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업이 훈장이다. 우리 집안에는 의사도 없고, 경찰도 없고, 변호사도 없다. 우리 집안에서 “강 선생!” 하고 부르면 모두가 돌아본다. 오빠가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셨는데, 영안실에 와서 어느 강 선생이 돌아가셨냐고 물을 정도였다. 나는 아이를 다 키우고 45살에 전임교수가 되었고 은퇴한 상태이니, 지금은 영인문학관이 나의 정체성에 가깝다. 사람들이 신문에 난 전시회 소개지를 한 달씩 보관하고 있다가 손에 쥐고 이 언덕까지 걸어 올라오곤 한다. 대학교 불어교재에 ‘내가 집을 지으면 정원을 사람들이 모이는 공원으로 만들겠다’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영인문학관 정원에서 한가롭게 문학의 정취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꿈을 이룬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김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
강 딸 민아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그 딸이 아들을 잃은 것이다. 손자와 딸을 연거푸 잃은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 딸은 아이를 잃은 후유증으로 죽었다. 내가 딸의 죽음 때문에 울고 앉아 있으면, 딸이 자신의 아들을 잃고 견디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며 우는 소리가 같이 들리곤 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죽음은 순서대로 가게 해주시면 좋겠다. 내가 이 부분에 막혀서 아직 기독교인이 못 된다.

김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나?
강 (막 질문을 한 순간, 분위기 있는 한 여인이 영인 문학관을 빠져나갔다. 내 시선이 그 여인에게 머문 것을 본 강인숙 씨는) 방금 본 분이 최인호 선생 부인이다. 지금 영인문학관에 최인호 추모 1주년 기념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 오실 때마다 운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잃으면 계속 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고통 한가운데 있을 때, 박완서 선생이 이런 말을 해줬다. 6·25전쟁 때 자기 가족이 너무 많이 당해서, 전쟁이 계속되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당했으면 했단다. 그런데 박완서 선생이 아들을 잃고 나서, 나처럼 울다가 피접을 갔는데 그곳에서 한 아기수녀를 만났다. 그녀에게 깡패오빠가 있어, 보기만 하면 사람을 팬다는 것이었다. 그 아기수녀가 박완서 선생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세상에 나쁜 깡패들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만 그런 깡패가 없으라는 법이 없잖아요.” 그 말을 들으니, 자식을 먼저 잃는 부모가 우리 말고도 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었다.

김 영인문학관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강 김남조 선생이 이 가난한 나라에서 시만 쓰고 살겠다는 사람만 보면 너무 고마워서 자신이 도움이 된다면 시골이건 어디건 간다고 하셨다. 나도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이 집은 이어령 선생이 지었지만, 재단은 내 퇴직금과 마지막 3년 치의 월급을 모아 만들었다. 정부의 보조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곳은 개인 문학관이다. 재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문학관을 하라고 많이 권유했지만 문학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서인지 계속 무산되었다. 결국 우리가 하게 되었다.

김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회는 무엇인가?
강 영인문학관의 오픈 전시회인 ‘문인 초상화 104인전’이다. 외국에는 문인초상화가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문인 초상화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서 이어령 선생이 1971년 ‘문학사상’을 창간하면서 그 표지에 화가의 초상화를 싣게 했고, 104점을 모아 오픈 전시회를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부채전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왕이 단오에 신료들에게 몇 개씩 하얀 부채를 나누어줬다. 그러면 양반들은 그 흰 부채에 화가의 그림을 받아 가보로 간직했다. 살이 여래 개 있어 접을 수 있는 접선, 특히 ‘고려선’ 은 중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산업화가 되지 않아 닥종이로 부채를 만들었는데 너무 비싸서 여자들과 서민들은 사용하지 못했다. 둥근 부채는 생활화가 되었지만, 접선은 예술작품이었다.

김 당신은 문학을 이해하시는 분이니 이런 질문해도 될 것 같다. 묘비명은 이어령 선생에게 부탁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선택할 것인가.
강 내가 쓸 것이다. 이미 생각해본 적이 있다. 긍정적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좋은 사람들 만나서 살았고, 힘든 부분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그 일에 충실했으니까, 이렇게 쓰고 싶다. “내 잔이 넘쳤나이다” (성경 말씀이 아니냐고 묻는데, 강인숙 관장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무엇엔가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 가만, 문소리가 들리는데, 이어령 선생이 돌아오신 것 같다.

 
김 현대 여성들에게 삶의 길잡이가 될 만한 조언을 해 달라.
강 상대방을 자꾸 건드려 무능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뭔가를 너무 주면 힘드니까 잔소리하게 된다. 과잉하게 주면 이쪽은 다 비어버려서 데미지를 입고, 저쪽은 부담스러워서 질식하고 넘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한국 여성들이 무엇보다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때가 되면 곰은 새끼가 딸기밭에서 딸기 따먹고 있을 때 사라져버린다. 혹여 맹수가 달려들까봐 염려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다시 돌아와서 새끼를 지켜보지 않는다. 지가 지 먹이를 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이에게 희생하느라 자신의 몫도 남겨 놓지 않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자식은 자식대로 부담스러워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 어느 단계에서 좀 끊어버리는 모진 마음이 필요하다. 지 인생은 지가 살게 해야 한다.

김 당신이 퀸(Queen)이라면 무엇 때문이라고 여겨지나
강 퀸이라니, 나는 차라리 막일꾼이다. 우표 붙이는 것에서부터 무엇이든 직원들과 함께 한다. 지저분하거나 험한 일 한다는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다. 사람대접이 중요한 것 같다. 내 아버지는 말년에 친구에게 큰돈을 사기 당했다. 그런데 이곳에 집을 지을 때, 아버지는 집 설계사로 그 사기꾼의 아들을 데려왔다. 대를 물려가면서 사기를 당하고 싶으냐고 했더니,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와 그는 전혀 다른 인격체이고, 그 사람을 설계 기술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왜 그의 아버지로 판단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펄펄 뛰면서 거부했다. 사람이 사람대접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퀸이라면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저녁을 준비하러 가기 위해 서두르던 강인숙 관장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더니 물었다. “지난 번 부채전시회 때, 김다은 씨는 달밤에 군무를 추는 사람들을 그렸지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홀딱 벗고 놀자!’라는 글귀와 함께, 달밤에 사람들이 전부 벗고 둥글게 춤추는 그림이었다. 강인숙 관장은 잘 가라고 웃었다.)

작가 김다은은…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이화여대 불어교육과와 동 대학원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제3회 국민문학상에 장편소설 ‘당신을 닮은 나라’가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및 창작집 ‘금지된 정원’ ‘쥐식인 블루스’ ‘모반의 연애편지’ ‘훈민정음의 비밀’ ‘이상한 연애편지’ ‘러브버그’ ‘위험한 상상’ ‘푸른 노트 속의 여자’와 문화칼럼집 ‘발칙한 신조어와 문화현상’을 출간했으며, 서간집 ‘작가들의 연애편지’ ‘작가들의 우정편지’ ‘작가들의 여행편지’ ‘해에게서 사람에게’를 엮어냈다. 프랑스어 소설 ‘Imagination dangereuse' 'Madame'을 발표했으며, 번역서 ‘다른 곶’ ‘에쁘롱’ ‘모데르니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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