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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은이 만난 퀸5 - 연극배우 및 연출가 윤석화
김다은이 만난 퀸5 - 연극배우 및 연출가 윤석화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5.01.28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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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향한 열정으로 평생 외로웠던, 영원의 신의 아그네스!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활약한 최초의 아시아 여성 프로듀서!

4년 만에 영국 런던에서 돌아온 윤석화 씨는 최근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연극 ‘나는 너다’를 무대에 올렸다. 나라나 조국은 아니더라도, 연극 하나만큼은 지키고 싶었기에 그녀는 연극계에서는 안중근처럼 살았다. 하지만 사생활에서는,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처럼, 살아남기 위해 차마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을 이어온 삶의 족쇄도 있다.
16살의 신의 아그네스였던 윤석화 씨가 올해 환갑의 나이로 데뷔 40주년을 맞이한다. 답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술을 하기 위해 평생 투쟁해온 한국 최고의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윤석화! 김다은 교수가 2015년 첫 번째 퀸인 그녀를 만나 광림아트센터 BBCH홀 분장실의 거울 앞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근 대중에게 모습을 잘 보이지 않으셨는데, 근황에 대해 알려 달라.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4년 동안 런던에 가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연극과 뮤지컬을 다섯 작품 프로듀싱 했다. 문화 적응과 언어습득 그리고 교육과정 등 많이 힘들었는데, 일단 적응하고 나니 그곳 시스템이 훌륭하고 기계적이어서인지 치열함이 적더라. 한국의 연극계는 인프라가 약해서 가내 수공업 형태에 가깝다. 가내수공업은 치열함이 생명인데, 내 취향이다. 웨스트엔드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해도 좋았겠지만, 이 나이에 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 후배들을 위해 작은 씨앗이라도 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왔다. 

당신은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니라 무대 뒤로, 즉  연극 ‘나는 너다’의 연출가로 돌아왔다. 연극계의 후배들을 위해 심는 씨앗으로 안중근 의사를 선택한 이유는?

상업적인 성공만 꿈꾸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런던에서 프로듀싱 했던 작품 중에 ‘Top Hat'은 영국 올리비에 상 등 3개의 상을 석권했다. 이 작품을 한국 무대에 올렸다면 관객을 동원하거나 홍보하는 데 더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한데 한국에 돌아오니 뮤지컬이 지나치게 성행하고 있었고, 연극은 거의 전멸해 있었다. 아! 연극을 살리고 싶었다. 아! 세대 간의 갈등을 겪으면서 희망을 잃고 차가워진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안중근과 그의 아들 안준생의 이야기다.
한국인치고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안준생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연극 팜플릿에서 작가 정복근 씨는 “1939년 10월 16일자 친일신문 경성일보에,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부친이 하신 일을 사죄하는 안준생의 모습이 실렸다.”고 밝혔다. 당시 사람들은 존경하는 위인의 아들을 폄하할 수 없어서 숨겨 왔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그런 아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무관심한 상태였다. 연극 ‘나는 너다’는 안중근의 영웅적인 삶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희생양인 안준생의 안타까운 삶을 조명한 점이 가장 새로웠다.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는 고전적인 애국심을 되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남은 가족은 일제 치하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상상하고 남지 않나. 장남은 일본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차남 안준생은 나라나 민족이 무엇인지 판단할 나이도 아니었다. 항상 협박당하고 감시당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안준생이 절규하는 대사가 있다. ‘영웅의 아들도 영웅이어야 합니까?’ 사실 이 작품은 안중근 서거 100주년 기념 작품으로 2010년에 초연했던 것이다. 역사극이 갖는 위인전의 재연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안준생의 삶도 함께 조명했다. 아버지와 아들, 영웅과 비열한 삶,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는 영웅 안중근!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국이나 민족 그리고 아버지까지 부인할 수 있는 안준생! 당신은 두 부류 중에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연극 부분에서 만큼은 안중근처럼 살려고 노력했다. 살아 있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 안중근 의사의 자취를 밟아보기 위해 연해주 일대를 10일 동안 밤낮 기차를 타고 다니며 헤매었다. 아들 안준생이 대사에서 ‘나라, 민족, 그까짓 게 뭔데요?’ 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은 매우 소중하다. 땅덩어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지켜야한다. 안중근 의사는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겼지만, 많은 이름 없는 대한의군들은 가족도 버리고 어떻게 그렇게 황량한 들판을 헤매었을까 싶었다.
나도 연극을 지키겠다고 버티면서 참으로 외롭고 힘들었다. 김민기 씨의 노래 중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윤석화 씨는 젖은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들판에 한 아이가 울고 서 있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맞으면 …아름다운 그 이름, 사랑이어라.”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 만주 벌판에서 가슴이 뜨거웠다. 가슴이 뜨거운 자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죽으면 죽으리라. 안중근은 나라도 지키는데, 나는 연극 하나만큼은 지키려고 외롭게 싸웠다. …그렇지만 내 개인의 삶은 안준생에 가까웠을 것이다. 

개인의 삶이 안준생 쪽이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버린 중요한 것이 있는가?

나의 가장 큰 딜레마는 역시 학력 문제였다. 가짜 이화여대생이 된 과정은 어린 시절의 돌이키고 싶지 않은 상처와도 연결되어 있다. 1남 6녀의 막내였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집안이 어려워졌고, 가족이 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형태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한국에 남은 오빠는 군대에, 언니는 간호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고, 나는 고등학교 때 이모 집에 맡겨졌다. 금란여자중학교와 금란여자고등학교를 다녀서, 나는 이화여대를 가로질러 등교하곤 했다. 가족과는 전화 한 번이 어렵고 이메일도 없던 때라 외롭고 힘들었다. 이모도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나는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화여대는 내 놀이터였고, 친구들을 따라 이화여대에서 도강을 하기도 했다. 

당신이 이화여대생이라고 타인들에게 말한 첫 번째 계기가 무엇이었나?

경음악 평론가인 이백천 씨가 이화여대를 방문했다. 그는 청년문화의 기수이자 아이돌 스타의 대부나 다름없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프로그램인 ‘젊음의 행진’을 만들기 위해 각 대학의 재간꾼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이화여대에서 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았고 스카웃하고 싶어했다. 분위기에 잘못 휩쓸리며, 나는 얼떨결에 생활미술과 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백천 선생은 적극적으로 출연을 요청하셨고, 거짓말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뭐 어차피 한 번인데…”라며 출연을 했다. 출연 이후 이번에는 피디가 더블엠씨까지 제의를 해와, 나는 그날 이후 잠적을 해버렸다. 

 

연극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당시 이모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사돈 친척 댁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데 그 집에서 몰래 감춰둔 엔화가 없어졌다며, 내가 도적질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 원인의 배경에는 가장 친한 친구의 배신이 있었다. 가족과는 연락도 제대로 안 되고, 친구들이 다 간 대학에도 가지 못했는데, 도둑 누명까지 쓰고 이모와 친구들이 등에 칼을 꽂는 것 같아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길을 헤매었다.
그런데 운명이라는 것이… 길에서 이백천 선생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르시랑스’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있다고 들었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신 것 같아 안타까워하던 때였다. 감옥에서 나와서 나와 우연히 만난 것이다. 근황을 물으시기에, “대학 중퇴하고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때는 일본으로 유학 준비 중이었다.
이백천 선생은 유학준비 중이면 시간이 많을 테니, 나에게 CM송을 해보라고 하셨다. CM송을 부르니, 수입이 짭짤한 반면에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니 할 만했다. 그러다가 유학 비자를 받기는 받았는데, 유학생 전면 여권 금지령이 떨어졌다. 내 팔자에 무슨 공부냐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마침, CM송 사무실 옆방에 세들어 있던 민중극단의 대표께서 연극을 권하셨다. 시집 가기 전에 좋은 추억을 쌓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연극을 시작했다.
그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이대여대 중퇴생임을 자주 자랑삼아 거론하셨는데, 불편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아니라고 밝히지 못했다. 그렇게 이백천 선생을 만난 인연으로 연극의 세계로 깊게 들어갔다.

‘나는 너다’의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많은 외교관들이나 지인들과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믿음을 지녔기에 삶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던 순간을 이야기해 달라.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믿음의 딸이다. 삶의 마디마디마다 하나님이 개입하고, 지금도 왜 안중근의 연극이 필요한지 알게 해주신다. 안중근 의사가 예수처럼 부활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정신이 부활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삶의 진실과 관련해서는… 자서전을 쓰자는 제의가 와서 학력에 관한 진실을 밝히려고 한 적이 있었다. 막상 고백하려니, 내가 왜 대학에 가지 못했는지 가족상황이나 가정환경 등을 함께 설명해야만 했고, 그것은 당시 살아계신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었다. 2007년에, 안식년을 맞아 연극이나 세상의 일과 동떨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 밥 퍼주는 최일도 목사님의 다일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영성수련원에 참석하려고 설곡산에 들어갔었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나를 돌아보려고 그곳에 갔는데도, 목사님은 웬일일지 여러 유행가를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랑을 위하여’라는 유행가 중에 ‘거짓의 옷을 벗어버렸다.’라는 구절이 흘러나왔다.
순간 왜 여태 거짓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했는지, 후회와 자책이 솟구쳤다. 목사님도 “운전하다가 이 구절을 듣고 강으로 빠질 뻔했다”고 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 내 홈페이지에 가짜 학력에 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고, 삶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그때 고백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너무 후련하다. 다 내려놓으니 거짓의 짐을 벗어버린 느낌이다. 그때 고백하지 못했다면 나는 적어도 아이에게 떳떳한 어머니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가짜 학력에 대한 자료가 따라다닌다. 내 죄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치러내야겠지만, 아들과 딸이 한글을 읽을 나이가 되었다. 그들이 상황을 정리해서 이해할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떳떳한 엄마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는데, 엄마로서의 여정을 말해 달라.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갖지 못했었다. 포기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힘들고 아파할 때, 하나님이 한 생명을 품에 안겨 주셨다(입양했다). ‘엄마’라는 이름도 주셨다. 이제 아들은 12살이고 딸은 8살이다. 아들은 수민(秀珉)인데 백성처럼 겸손하고 왕처럼 진지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다. 딸 수화(秀和)는 최고의 평화가 되라는 뜻인데,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피스 메이커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화는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싶어한다.

당신의 교육적 기본 마인드는 무엇이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중요하게 가르치는가?

내 아이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엄마는 아니다. 아이에게 헌신하면서 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일을 안 할 때는 내가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는데, 일을 할 때는 미안해서라도 더 극진하게 아이들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엄마라고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 엄마에게 단점이 있음을 알게 하자.’라는 식이다. 어떤 영화에서 ‘사랑은 미안하다는 소리를 안 하는 것이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해, 고마워,라는 말도 많이 하지만, 미안해, 엄마가 너무 바빠서 미안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아이들에게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예의와 질서이다.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행복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선택한 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신과 아이와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해 달라.

아들 수민은 너무나 질문이 많아 ‘왜?’를 입에 달고 산다. 별명이 ‘프린스 Why'다. 최근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나에게는 고추가 있는데 수화에게는 왜 없어? 여자가 왜 아이를 낳아?”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해줬다. “우리가 흙에 씨앗을 심잖아. 땅이 없으면 씨앗을 못 뿌리잖아. 여자는 부드러운 흙이나 대지와 같고, 남자는 땅 속에 뿌려지는 씨앗과 같은 거야. 네 고추가 식물이고 나무야. 여자와 남자는 역할이 다른 것일 뿐이야.” 내가 제법 설명을 잘한 것 같지 않나? 하하.

당신의 결혼 생활은 어떠한가? 아내로서 남편에 대해서도 말해 달라. 

혼자 살면서 겪었던 고난은 고난도 아니더라. 결혼하기 전에는 내가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내가 별로 착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여정 속에서 지경을 넓혀 갔다. 내 남편은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그와 다툴 때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은 천재거나 천치다.”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천재지만,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천치이다. (필자가 “선생님도 비슷한 면이 혹시 있지는 않으세요?” 하고 물었더니, 윤석화 씨는 “아마 비슷하니까 서로 만난 것이겠죠, 하하” 하고 대답했다.).
아시겠지만 천재를 대하는 것도 힘들고 천치를 대하는 것도 힘들다. 20년 동안 그 사람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때로는 에미처럼 그의 고난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의 고난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남편을 사랑하고, 열녀 같은 면이 있다. 하지만 남편은 때로 내가 일을 너무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내가 지켜야할 것을 지켜내는 것도 부부라는 동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윤석화 씨는 한동안 눈망울을 굴리다가 분장실의 거울을 바라보며), “여보! 20년 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우리가 함께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터널을 지나왔어요. 이제, 같이 공유하고 평화롭게 늙어갈 날이 우리 앞에 있고, 두 아이가 있으니, 잘 늙어갑시다. 남은 생애에서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에 감사하면서 다른 사람들과도 많이 나누면서 살아가요. 여보, 사랑하오!”  

당신의 삶을 무대에 올린다면 어떤 순간을 올리고 싶나?

삶의 가장 연극적인 부분은 어떤 사건이 아니다. 뜨거운 가슴 때문에 외로웠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힘들게 아르바이트 하면서 공부할 때(80-81년 뉴욕대학 드라마 전공, 81-84년 뉴욕시립대학 공연학 전공), 너무 힘드니까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싶다고 느껴지면, 전철을 타고 브루클린 다리 밑에 내려서 갈대밭이 펼쳐진 들판을 하염없이 걷곤 했다.
허영자 시인의 시를 조동진 작곡가가 만든 노래, “쓸쓸한 날에 강변으로 나가자. 아주 쓸쓸한 날에 강변을 걸어서 저 벌판으로 나가자”를 부르며 걸었다. 그러고 나서 읊조렸다. “이 쓸쓸함도 곧 희망으로 바뀔 거야. 그러려면 이 강변을 지나 저 벌판을 지나가야겠지.” 내 삶에 드라마가 상당히 많았는데, 고비 때마다 나는 이 노래를 부르며 나에게 용기를 내게 했다. 항상 가슴이 뜨거웠기 때문에, 나는 벌판에서 발가벗고 서 있는 아이 같았다! (윤석화 씨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노래하며 대사를 읊었고, 유일한 관객인 필자는 박수를 쳤다.) 그 힘든 미국 유학시절(81-84년) 중에 한국에 들어와서(83년 8월-84년 6월) 그 유명한 ‘신의 아그네스’를 공연할 수 있었다. 연극적이지 않나?   

연극대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면?

세 가지가 있다. 우선, ‘신의 아그네스’에서 아그네스가 아이의 목을 졸라죽이고 하는 말이 있다. “왜 우세요? 하지만 나는 믿어요.” 나는 그 믿음에 반했다. 그런 믿음을 지니고 살고 싶었다. 두 번째 ‘덕혜옹주’에서 일본에서 도망치도록 도운 유모가 유령이 되어 덕혜옹주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애기 씨, 더러움은 더러움일 뿐입니다. 그 더러움으로 인해서 섞이지 마세요.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십시오.” 유명인이다 보니 말 못할 음해나 억울한 일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살아가면서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섞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마스터 클래스’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하는 대사가 있다. “예술이 없어도 물론 내일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겁니다. 하지만 예술이 그 무엇을 변화시켰다고 믿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이지만, 누군가는 꼭 지켜내야 한다는 믿음으로 연극을 지켜왔다. 

올해 환갑이신데, 여성이 나이 들어가면서 매력을 유지하는 법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어릴 때 사람들이 나보고 예쁘다고 하면, 어머니는 예쁘다는 소리 대신에 “밉지는 않아”라는 말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밉지도 예쁘지도 않으니까, 내가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고운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눈, 코, 입 하나하나가 중요했지만, 살아보니까 눈코입이 사람마다 다를 뿐이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나이와 함께 드러나는 것 같다. 늙음의 아름다움이 있다. 나이가 든다는 특권이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향기가 다르다. 스스로 향기의 주인공이 되어갈 때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겠는가. 

지금 당신은 우리가 기억하는 화려한 무대 위의 윤석화 씨가 아니고, 낮아지고 겸손해져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과 같은 모습이다(우리는 실제로 분장실의 거울 앞에 앉아 있다).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안중근이 남긴 표현 중에 ‘자중자애’라는 것이 있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누구나 내가 못나 보이고 나를 미워하는 시간이 있지만,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콤플렉스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이유가 나를 나다운 모습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견주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중자애 한다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은 예술을 통해 생겨나기도 한다. 더구나 장점 없는 사람이 없고 단점 없는 사람도 없다. 내 단점을 인정하면 타인의 단점도 인정하게 된다. 타인의 장점을 보게 되면 내 장점도 드러난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 누군가와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좋은 나, 스스로 자족하는 나여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나였으면 좋겠다.  

2015년의 첫 번째 퀸이신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달라.

제 인생의 2막인지 3막인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인 삶을 살고 싶다. 만 60세부터는 하나님께 서원한 일, 생명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 미혼모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고자 한다. 아이를 낳아서 입양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들이 자기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나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여자는 땅처럼 품을 수 있는 우주다. 특히 퀸이라면, 여성 리더라면 섬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윤석화 씨는 여운 있는 한 마디를 남겼다.) “제가 앞으로 퀸답게 살게요.”

김다은은...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이화여대 불어교육과와 동 대학원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1억 고료 제3회 국민 문학상에 장편소설 ‘당신을 닮은 나라’가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및 창작집 ‘금지된 정원’ ‘쥐식인 블루스’ ‘모반의 연애편지’ ‘훈민정음의 비밀’ ‘이상한 연애편지’ ‘러브버그’ ‘위험한 상상’과 문화 수필집 ‘너는 무엇을 하면 행복하니?’, 그리고 문화 칼럼집 ‘발칙한 신조어와 문화현상’이 있다. 서간집 ‘작가들의 연애편지’ ‘작가들의 우정편지’ ‘작가들의 여행편지’를 엮어냈다. 프랑스어 소설 ‘Imagination dangereuse' 'Madame'을 발표했으며, 번역서 ‘다른 곶’ ‘에쁘롱’ ‘모데르니테 모데르니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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