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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독립운동 투사, 한규설 대감 가(家)
구한말 독립운동 투사, 한규설 대감 가(家)
  • 권지혜
  • 승인 2015.03.06 1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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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칸 규모에 격조 있는 한옥의 원형

 

▲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 한규설 가옥

한규설 대감은 을사조약 당시 찬반을 거수했던 8인의 관료 중 끝까지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은 3인에 속한다. 일본은 ‘남작’의 지위를 내리며 권력의 달콤함으로 그를 구슬리려 했지만 현혹되지 않았다. 1890년 경 지어져 도시개발로 보존이 어려웠던 고택을 ‘명원민속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이건했다.

사진_ 양우영 기자 자료제공_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

 

“사계절 푸르게 가옥을 둘러싼 소나무에서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끝까지 일본에 맞선 그의 강직함이 묻어난다.”

 

1890년경에 지어진 한규설 대감 고택은 본래 서울 중구 장교동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980년 도시개발과 함께 멸실될 위기에 처하자 성곡 선생의 부인인 명원 김미희 여사가 소유주인 박준혁 선생의 부인 하옥순 여사로부터 기증받아 국민대학교의 대지에 이건했다. 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숭례문 복원을 했던 김의중 소장이 고택의 이건을 담당했다.
김미희 여사는 자신의 호를 써서 이곳을 ‘명원민속관’이라 명명했다. 현재는 한국의 생활문화를 교육하고 체험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전통 다례를 배우고 안채나 사랑방에 앉아 그 당시 한규설 대감처럼 차를 마신다. 마루에 앉아 기와에 걸친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하늘의 푸름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운치가 있다.

▲ 사랑채는 사랑마루, 사랑방 및 앞-뒤 방으로 구성된다.

‘개량식한옥’의 기운이 태동되던 시대

한규설이 집을 지은 1890년대는 개화사상이 무르익던 시기다. 그는 시대에 발맞춰 사랑채에 보일러 난방을 하고, 그 어열을 이용한 온실을 만드는 등 시대상이 반영되었다. 이건하면서 현재는 전기 보일러를 설치했다고 한다.
주택은 솟을 대문, 사랑채, 안채, 별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분된다. 남쪽 외곽에는 연못과 함께 정자와 초당이 있다. 전체의 건물들은 ‘ㄱ’자 평면을 가지고 채의 분할로서 자연스럽게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반에 뒤로 방 1칸이 꺾여 있다. 사랑방, 대청, 방과 대청에 툇마루가 있고 유리 미닫이가 시설되었다. 개량식 집의 통식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4칸이 부설되며 ㄱ자형 집이 되었다.
행랑마당-사랑마당-안마당-사당마당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위계는 사대부가의 생활공간의 구조를 보여준다. 한국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으로서 60칸 규모에 격조 있는 한옥의 원형을 잘 살렸다.

대감가의 상징, 솟을 대문

솟을 대문은 그 집 주인의 권위를 뜻한다. 양옆의 행랑보다 지붕을 높게 올려 솟을 문이라고 부른다. 사대부 집의 경우 초헌(?軒)이나 말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턱을 아예 없애거나 凹형의 문턱을 두기도 했다.
한규설 대감가의 솟을 대문은 가마를 타고 드나들 정도의 크기이다. 대문은 문간방과 헛간 사이에 구성된다. 문간채는 빗물과 땅의 습기로부터 목구조를 보호하기 위해 하부는 사고석과 전(塼)을 쌓고, 처마 밑에 여닫이 창을 짜 넣었다.

▲ 한규설이 조정 대신들과 회의를 하곤 했던 사랑채 안쪽의 사랑방.

조정 대신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사랑채

안채 및 다른 영역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솟을 대문과 중문을 지나면 있다. 대문채 좌향과 90도 각으로 돌아앉아 서남향을 하고 있다. 이 공간은 일반적으로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거나,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학문을 나누고 시흥을 즐기는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을사조약의 찬반 여부에 대한 어전회의를 열기 전, 한규설이 박제순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팔작지붕 밑에 사랑마루, 사랑방 및 앞-뒤 방으로 구성된다. 상류주택의 사랑방은 기거와 침식 외에도 독서, 예술 활동, 접대 등의 많은 행위가 이루어졌던 다기능 공간이다. 유교적 생활 문화와 선비 의식으로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있다. 사랑마루는 날씨가 따뜻할 때에 바깥주인이 접객을 하거나 담소하는 장소이다. 사랑마루에서 보는 마당 경치가 기품 있다.
여름철에는 사랑방의 들문을 열면 방과 마루가 통합공간이 된다고 한다. 마루를 두른 문들을 열면 자연과 통합공간이 된다. 자연과 함께 했던 대감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사랑 마당에는 석지(石池), 석연지(石蓮池)에 물을 담아 연을 키우거나, 물에 비친 파란 하늘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 안채의 안방에서 바라본 풍경. 창밖의 풍경이 창틀을 액자 삼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독특한 구성의 안주인의 공간, 안채

안채는 여성의 공간이다. 대개 부엌과 참방, 대청과 건넌방이 한 채에 모여 있다. 며느리나 어린 자녀도 이곳에서 함께 생활했다. 안채는 남쪽인 전면에 3칸짜리 안방과 6칸의 대청, 그리고 2칸짜리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위에는 부엌과 찬방이 있다.
부엌과 안방이 남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지 않은 것은 집터에 맞추어 집을 지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는 조선 후기 상류 주책의 유형에서도 독특한 구성이다.
지붕은 팔작과 맞배가 한 쪽씩 차지하였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당시 여성들의 외부 출입을 제한했던 사회상을 반영한 공간배치로 볼 수 있다. 남편이나 친척 외의 남자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의도이다.
대청은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거실의 역할을 한다. 주로 가족행사를 이곳에서 치른다. 가족들이 모이는 열린 공간인 대청과 달리 안방은 폐쇄적인 의미를 가진 개인적인 공간이다.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주로 안방에서 이루어졌다.
사당은 안채와 곳간채 사이에 있고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남향으로 지어진 안채의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당이 보인다. 사당은 주로 북쪽에 위치하는데 이는 한규설 가옥도 마찬가지다.
사당 옆 장독을 지나 옆길로 들어가면 별채가 나온다. 별채는 반빗간의 기능에 방이 부설되었다. 별채는 현재 국민대학교 다도동아리의 동아리실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 ‘녹약정’ 정자는 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에는 인공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새롭게 조성된 정자와 초당(草堂)

정자는 주로 상류의 주택에 인공 연못을 만들거나 자연 연못을 이용하여 조성된다. 자연 그대로의 풍류와 운치를 즐기기 위한 여유 공간이다. 많은 사대부들이 정자에 앉아 나무와 꽃이 함께 어우러진 연못을 보며 풍류를 즐겼다.
바깥 행랑채의 옆으로 난 문을 나가면 정자와 초당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다. 이 정자는 녹약정(綠若亭)이라 이름 붙여졌다. 녹약정은 한규설 고택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 연못을 조성하여 지은 것이다. 고 김미희 여사의 우이동 다실 이름인 녹약재(綠若齋)를 따서 녹약정이라 하였다. 정자는 1칸짜리 방과 큰 마루가 연속된다. 이는 방과 마루와 앞의 풍경을 연속적 구도로 하려는 뜻이라고 한다.
초당은 전라남도 해남의 대흥사 일지암과 동일한 형태로 건립했다. 이곳엔 1칸의 방이 있다. 크기는 딱 한 사람이 차를 음미하며 사색과 명상을 즐기기에 적합한 크기로 지어졌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귀하고 좋으나 이미 아는 것을 시행하는 것이 더욱 귀하고 크니라. -한규설의 유훈”

 

을사오적의 반대편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참정대신, 한규설

한규설 대감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이다. 어영대장 총융사 한규직의 아우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28세에 진주병사에 발탁되었다. 1885년 금군별장을 거쳐 우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던 유길준을 연금 형식으로 보호하고 있으면서, 그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의 집필을 도왔다고 한다.
한규설은 1905년 의정부 참정으로 내각을 조직했다. 당시 일본의 한국 침략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워 어마어마한 기세로 서울에 들어왔다. 을사조약 체결을 강행하려 갖은 협박을 가했다. 을사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탈하려고 강제로 맺은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관료들은 그들의 강요를 받아 어전회의를 열게 되었는데 일본은 군사령관, 헌병사령관 및 수십 명의 헌병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개별 심문을 하면서 을사조약의 찬성을 강요했지만 한규설은 적극 반대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말외교비화>(1930)에 보면, ‘슬피 부르짖는’ 참정대신 한규설이 별실로 끌려 나가는 순간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대신들을 보며 “너무 어리광을 부리면 죽여버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의 압박의 강도가 느껴진다. 이러한 압박으로 대신 8명 중 5명이 찬성으로 돌아선다. 이 조약이 찬성될 상황에 이르자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이를 거부하게 하려다가 중도에 쓰러지는 소동도 발생했다고 한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의 애국심과 어떤 말에도 현혹되지 않는 우직함이 느껴진다.
이런 한규설의 살신성인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과반수론을 펼치며 을사조약을 강행했다. 한규설은 반대를 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한다. 대궐 수옥헌 골방에 감금당하기도 했다. 일본은 강제로 국권을 피탈한 후에 한규설에게 ‘남작’이라는 직위를 주며 구슬린다. 그러나 한규설은 작위를 거절한다. 한규설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일컬어 ‘살아 숨 쉬는 시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지 못했는데 무슨 낯으로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칩거생활을 했다.

죽는 순간까지 지켜진 한규설의 지조

한규설은 1930년 11월 8일 만 75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한규설의 장례식의 발인 모습을 적은 부음 기사는 “적극적으로 큰 공을 세운 바는 없으나 일생에 깨끗한 지조를 지키었을 뿐 아니라 생전에 아낌없이 재산을 공익사업에 던졌다”고 한규설을 평했다.
한민족의 교육은 한민족의 손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취지의 민족교육운동 단체인 조선교육회가 발족할 때 발기인 명단 맨 처음에 한규설이 있었다. 한규설은 25년 간 칩거생활을 하면서도 이 단체에 고문으로 이름을 걸어두고 두 차례 크게 재산을 기부했다고 한다.
1922년에 시가 3만 원가량의 350평짜리 가옥 한 채를 회관 건물로 쓰라고 내놓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28년에는 벼 수백 석을 거둬들이는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했다.
한규설은 유언으로 큰 상여 말고 네 사람이 가마처럼 울러 매는 작은 상여를 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부음도 없이 화환도 사절하고 자택에서 발인했다. 전직 고관대작으로서는 유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망국 재상이 무슨 면목으로”라며 사람들을 만나기를 기피했다고 한다. 혹자는 몸으로 맞서 싸우고 대항하는 것만이 애국이고, 그런 애국을 하는 사람만이 애국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꿋꿋이 뜻을 굽히지 않고 나라를 지켜내려 했던 한규설의 투쟁은 시대의 흐름에 무너졌지만, 그의 지조와 절개는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 별채는 안채의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국민대학교 다도동아리 ‘명운다회’에서 동아리실로 사용하고 있다.


명원민속관은…

주택건축이라는 문화 자산에 한국의 전통 생활문화를 위한 여러 가지 문화 프로그램을 다루고 있다. ‘다도’가 국민대학교 교양과목으로 개설되어 이곳에서 강의가 이루어진다. 기획 프로그램으로 전통 다례, 전통 건축, 다악, 전시회 등이 고루 개최된다.

개관시간
오전 9시~오후 5시(주말과 공휴일은 휴관)
동하계 방학 동안에는 내부 정비를 위해 휴관한다. 단, 별도의 참관 절차를 통해서는 개관이 가능하다.
자세한 사항은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 홈페이지(http://museum.kookmin.ac.kr/mwfh/index.jsp)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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