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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몰랐던 한글 이야기
우리가 잘 몰랐던 한글 이야기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10.28 1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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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스토리

우리나라 5대 국경일 중 하나인 한글날은 한글의 창제와 반포, 문자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이다.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게 된 계기와 한글이 상용화되기까지의 우리가 잘 몰랐던 일화들을 소개한다.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참고도서 <세종, 한글로 세상을 바꾸다>(창비)

남달리 글 읽기를 좋아했던 세종,
김화의 살부(殺父) 사건을 계기로 글을 만들다

어린 시절, 세종은 책을 무척 좋아해 책을 읽느라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러한 책 읽기 습관은 임금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세종 1년인 1419년 3월 27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천성이 글 읽기를 좋아하며 날마다 경연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책을 통해 알리고자 했다. 백성들의 병 치료를 위해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향약구급방>(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학서)과 <농사직설>(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을 편찬해 배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때부터 새 문자에 대한 고민을 키워 오던 중, 세종의 새 문자 창제를 자극한 사건이 있었다. 진주에 사는 김화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세종은 이런 사건을 막으려면 책을 통해 가르쳐서 백성의 근본 심성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문맹인 백성들을 위해 만화책처럼 그림을 더한 <삼감행실도>를 편찬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백성들이 완전히 알아보기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또한 말과 글자가 다른 혼란스러운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서라도 그 발음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새 문자가 필요했기에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었다.

피리 악공과 의원을 불러 소리를 연구하다

새 문자 연구에 열중하던 세종은 어느 날 피리 악공을 불렀다. 세종은 그에게 향피리, 세피리, 당피리를 가져오게 한 후 그것을 불게 했다. 피리의 생김새는 사람의 목과 입을 닮아 말소리를 연구하기에 좋았다. 피리에서 소리가 나는 원리는 사람이 말소리를 내는 원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피리 악공이 돌아간 후 세종은 피리를 직접 불어 보면서 소리를 연구했다. 이렇게 하여 ‘궁상각치우(서양의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오음에 부합하여 훈민정음의 운해(韻解)를 창안했다. 또 세종은 내시를 시켜 시체를 검안한 경험이 있는 의원을 은밀하게 불렀다. 세종이 갑자기 의원을 부른 까닭은 사람의 발음기관 해부도가 필요해서였다. 세종은 의원에게 기도와 식도, 성대, 울대 마개, 목젖 등 여러 소리 기관의 형태와 역할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고 소리를 내어 보며 글자 소리를 연구했다.
 
백성과 소통하기 위해 훈민정음 보급에 힘쓰다

훈민정음 반포 6개월 전, 중전이었던 소헌 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에게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쓰게 하고, 여러 가지 불교 행사를 지냈다. 같은 해에 세종이 불교 행사를 크게 열려고 하자, 몇 관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으므로 이를 반대할 수는 있으나, 수양 대군에게 <석보상절>을 쓰게 한 것은 찬성하고 그보다 일의 경중이 가벼운 불교 행사 개최는 반대하니 일관성이 없었다. 이에 세종은 관리들에게 죄를 묻고 직접 훈민정음으로 공문서를 작성했다. 훈민정음을 만든 임금이라도 직접 공문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관리들은 그것을 보고 새 문자의 힘에 놀랐다. 한자나 이두로 작성한 공문서는 우리말로 번역해 겨우 이해했는데, 훈민정음으로 쓰인 공문서는 임금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듯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백성과 소통하기 위해 하급 관리들을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넣었으며, 백성들을 위해 민교인 불교를 다룬 책들도 훈민정음으로 펴냈다. 집현전 학자에게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사서와 <삼감행실> 등의 유교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해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도록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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