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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후, 명성황후의 생가를 찾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 명성황후의 생가를 찾다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6.02.29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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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인 생가 탐방 20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 명성황후는 열강의 이권 침탈과 개화의 격변기 속에서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다.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조각이기도 한 명성황후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 경기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로 가 보자.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명성황후 생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는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妃)로 격동의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해 개방과 개혁을 추진한 인물이다. 1895년 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경기도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는 그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8세에 여주에서 서울로 올라간 후 왕비로 간택되어 책봉될 때까지는 서울 감고당에서 지냈다.
이 집은 원래 1687년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27평뿐이었고, 1995년에 행랑채, 사랑채, 별당 등이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복원된 생가 주변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 명성황후탄강구리비, 향토문화재 제5호 민유중(인현왕후의 아버지) 신도비·묘, 하마비(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 놓은 석비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등의 문화재와 원형을 이전하여 복원한 감고당, 명성황후의 업적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한 기념관, 명성황후와 관련된 행사들을 상영하고 공연하는 문예관, 조선 후기 서민 취락의 모습을 재현한 민가마을, 호수·조각마을이 꾸려져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태어나 8세까지 살던 가옥,
조선 중기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

가옥의 구조를 보면, 전면에 ㅡ자형의 행랑채가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며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 옆으로는 독립된 ㅡ자형의 별당이 있다. 안채는 가옥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는데, 주로 부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가옥의 가장 앞쪽에 자리하며, 안채와 바깥 행랑채 사이에 위치한다.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사랑방, 대청, 침방 등으로 구성된다. 대문의 양쪽에 붙어 있는 행랑채는 하인들의 방이며, 몸채의 곁에 따로 지은 별당은 다목적 공간으로 쓰인다. 안채는 14칸 규모의 민도리집으로, 8칸 규모 팔작지붕인 본채 한쪽에 6칸 규모의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본채는 전면에 퇴칸이 있는 5량 구조이다. 2칸의 안방과 4칸 대청, 1칸 반 건넌방, 2칸 부엌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1칸 반의 광이 위치하고 있다. 날개채는 3량 구조로 이루어졌다. 이 집은 재목이 그리 크지 않고 간살도 넓지 않으나,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8세부터 왕비 책봉 전까지 머물던 감고당,
공간 분리가 명확한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모습

감고당은 조선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은 집이다. 인현왕후가 왕비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명성황후가 8세 때부터 왕비로 간택·책봉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 원래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했으나 철거 위기로 2006년 고향인 여주로 원형을 이전, 복원하였다. 감고당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공간인 안채는 안방, 대청, 건넌방, 웃방, 다락, 부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의 일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하던 공간이다. 행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자리하였고,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사랑채는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 토론을 하거나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하며 문화생활을 영유하던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중문채는 중간 계층인 청지기 등이 거처하던 곳이며, 행랑채에는 머슴들이 기거했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長幼)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다.

탁월한 외교가인가, 외세 의존적 근대화인가
명성황후에 대한 사후 평가는 다양

1851년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명성황후(민자영-兒名)는 민유중의 직계 후손인 민치록과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흥 민씨의 딸로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고종 3년인 1866년 3월(음력),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그를 간택했으나, 총명하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명성황후는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여 식견을 갖추었고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서양 열강의 침탈, 뿌리부터 흔들리는 봉건 체제, 문호 개방의 움직임 등으로 격변기이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최익현의 규탄 상소를 계기로 시아버지인 대원군이 하야하자, 명성황후는 본격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계기로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일본과 청, 미국에 수신사를 파견해 서구 유럽과 이웃나라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개혁을 구실로 국권을 침탈해 올 때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 : 적으로써 적을 치게 함)의 국방 외교 전략을 강구하는 등의 외교술을 펼쳤다. 그러나 청나라의 힘을 빌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재집권하는 등 외세 의존적 태도로 일관해 자주성을 잃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 명성황후 생가 관람안내

주소: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 (능현동)
개관시간: 하절기(3~10월) 09:00~18:00 / 동절기(11~2월) 09:00~17: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관람요금: 어른 1,000원, 중고생 700원, 초등학생 500원, 6세 이하·65세 이상 무료
문의: 031-880-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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