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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오순 변호사가 만난 라이따이한의 안타까운 사연들
박오순 변호사가 만난 라이따이한의 안타까운 사연들
  • 송혜란 기자
  • 승인 2016.03.02 2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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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시대
 

베트남 전쟁 이후 현지에 버려졌던 라이따이한들이 몇 년 전부터 하나둘 한국인 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반기는 한국의 아버지는 극소수. 대부분의 라이따이한들이 한국인 아버지에게 문전 박대당하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라이따이한들의 한국 정착을 지켜봐 온 박오순 변호사를 만나 그 안타까운 사연을 들어 보았다.

취재 송혜란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그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이따이한(Lai Daihan)의 라이(Lai)는 ‘오다’의 뜻을 지닌 한자 ‘래(來)’의 베트남 어다. 따이한(Daihan)은 대한(大韓)을 표기한 것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을 의미한다. 즉 라이따이한은 한국에서 온, 한국인과 베트남 인의 혼혈인을 일컫는다. 현재 추정되는 라이따이한의 수는 1~2만 명 정도다.
“1960년 베트남 전쟁 시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 또 파견됐던 한국인 기술자의 자식들이 거기서 많이 태어났어요. 이렇게 저렇게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인원이 1만 명이다, 2만 명이다 하더군요. 정확한 수치는 확인 못 했지만 상당히 많은 라이따이한들이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베트남에 남겨진 라이따이한들은 꽤 힘든 삶을 살았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아군의 자식도 아니고 적군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얻은 마음의 상처가 클 법도 하다. 생활도 어려워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닌 이들도 수두룩하다고. 그래서 결국 아버지라도 찾기 위해 한국에 오는데, 그마저 여의치 않아 겪는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아버지 찾기가 쉽지 않죠. 우연히 찾아온 라이따이한으로 인해 소송을 몇 건 맡게 됐는데, 이게 아버지와 연락 자체가 잘 안 됩니다. 어렵게 연락이 닿아도 자식을 보려고 하지 않아요. 돈으로 회유하며 베트남으로 돌려보내려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데 대개 라이따이한이 아버지를 찾는 이유는 한국 아버지의 아들 혹은 딸, 한국 사람이 되고 싶어서거든요. 돈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베트남 전쟁은 끝났어도 라이따이한의 삶은 여전히 전쟁터

▲ 박오순 변호사의 도움으로 한국 아버지를 찾았던 한 라이따이한의 과거 가족사진. 사진=박오순변호사 제공

심지어 끝까지 자신의 자식임을 부인하며 문전 박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전쟁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케이스는 한국인 아버지를 찾아온 사남매들이에요.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찾았는데, 아이들에게 돈을 주며 다른 나라에 가서 살라고 말하더군요. 그 아버지는 좀 잘 사는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돈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받고 한국인이 되고 싶다고 하니까 돌변하더니 자신은 친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인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인지청구소송을 제기한 박 변호사는 승소해 네 아이들을 모두 아버지의 호적에 올릴 수 있었다.
“소송 제기 후에도 DNA 검사를 하려고 몇 번이나 날짜를 잡았는데, 아버지가 아예 연락을 끊고 미국으로 가 버렸어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없는 소송을 진행했지요. 베트남에 있는 어머니가 법정까지 와 증언을 했어요. 어떻게 그 남자를 만나게 됐고, 어떻게 살았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쭉 풀어 놨지요. 다행히도 DNA 결과 없이도 승소할 수 있었어요.”
이 같은 쾌거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들에게는 꽤 불행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사남매에게는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가 많아요. 큰딸의 아이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장애를 앓다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요. 베트남에 있던 엄마도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는데, 결국은 혈액암에 걸려 곧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사남매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도 남편 한 번 만나 보지 못해 더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죽기 전에 남편 얼굴 한 번만 보고 가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 어머니는…. 자식을 넷이나 낳고 몇 년을 함께 살았는데 얼굴 한번 보여 주기가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참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이 외에도 박 변호사가 접한 사건에는 하나하나 안타까운 사연들이 수도 없이 많다. 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왔다가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병에 걸려 추방당한 라이따이한도 있고,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은 받았는데 아무런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해 반지하 골방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사는 이들도 있다.

인지청구소송, 양육비 청구소송으로 권리 찾기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라이따이한들은 한국에서 인지청구소송을 통해 자식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아버지의 여권 사본, 주고받은 편지들을 근거로 인지청구소송을 진행할 수 있어요. 함께 살았던 생활의 흔적들을 보여 주면 어떠한 남자도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요.”
인지청구소송에서 승소하면 법적으로 호적상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된다. 향후 유산상속의 권리도 행사할 수 있다.
양육비 청구소송이라는 방법도 있다.
“앞서 말한 사남매의 경우 법적으로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받았지만 경제적인 지원은 없어 꽤 힘든 생활을 했었어요. 그때 제가 찾은 방법이 양육비 청구소송이었죠. 아버지가 부재한 동안 어머니 홀로 아이 넷을 다 키웠으니 그동안에 들어간 양육비를 책정해 받아 냈어요.”

각 사정에 맞는 처우 필요 - 국가, 사회적인 도움 미흡하다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소송 외에도 국가에서 그들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 라이따이한은 베트남 전쟁 후에 생긴 문제이며, 베트남 전쟁은 국가적으로 참여했던 것인 만큼 사회적인 도움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
“미국인도 베트남 전쟁 때 그곳에서 자식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자식들을 다 데리고 갔지요. 한국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자식이 혼혈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쉬쉬하는 분위기가 강했었죠. 요즘은 한국 남자들이 베트남이나 필리핀 같은 나라의 여성들과 많이 결혼해 국내에 다문화 가정이 많이 생겼잖아요. 다문화 가정을 위한 정책도 많이 만들어지고, 좋은 TV 프로그램도 등장했고요. 그런데 정작 국가가 참여했던 베트남 전쟁 이후에 생긴 라이따이한을 위한 제도는 많이 미흡한 것 같습니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인지청구소송에서 이겨 한국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갔는데도 그 아이는 한국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호적과 무관하게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법무부에서 보는 시험에 따로 응시해 합격해야 한다. 
“이는 상당히 부당한 겁니다. 물론 시험 자체가 어렵지는 않아요. 애국가라든지 한국의 강 이름, 문화재 명 등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제들이에요. 그런데 그것조차도 힘든 사람이 있다는 거죠. 실제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 추방 위기에 처한 라이따이한도 있어요.”
이에 박 변호사는 이러한 사람들만 따로 묶어서라도 각 사정에 맞게 처우를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면 한국어가 서툴러 취직을 하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붙여 준다든지 기술이 없다고 하면 직업 교육을 해준다든지 하는 것들이지요. 무엇보다 이 사회가 한번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베트남 전쟁 이후 생긴 라이따이한.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온 그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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