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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 사상의 창시자 , 이항로 선생 생가를 가다
위정척사 사상의 창시자 , 이항로 선생 생가를 가다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6.05.26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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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인 생가 탐방 23
 

구한말 위정척사의 정신으로 조선의 정체성을 지킨 화서 이항로 선생의 삶과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 경기도 양평의 생가를 찾아갔다.

진행 김이연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벽계마을의 자연 비경 속에 자리한 곳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5호, 이항로 선생 생가

화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선생은 조선 말 성리학자이자 위정척사 사상의 대표 학자이다. 뚜렷한 스승 없이 홀로 학문하여 공자,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하였으며,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벼슬을 사양하고 제자 양성에 힘써 화서학파를 이루었다. 이 화서학파는 후에 일제강점기에 항일 의병 운동을 주도했다.
이항로 선생 생가는 용문산에서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벽계천 중간에 위치한 노문리 벽계마을에 있다. 그 주변으로 울창한 숲과 새 을(乙)자 모양의 벽계구곡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이 마을은 광복 이전만 하더라도 수백 년 된 느티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어 수려한 비경을 자랑했으나, 이후 지주들이 모두 베어 팔아서 오직 한 그루만이 남았다고 한다. 생가를 중심으로 좌측에 화서기념관이 있고, 우측에는 후진을 양성하던 벽계강당이 있다.
가옥은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채, 대문간에 붙어 주로 하인들이 머물던 행랑채, 집의 가장 안쪽에 있는 안채로 이루어져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주택 구조라 할 수 있다. 가옥의 배치는 역 ㄱ자형 안채, 역 ㄷ자형 사랑채가 가로로 긴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담이 있어서 안채는 중문을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다. 안채는 경기 지방의 전형적인 평면에 안방과 윗방의 바깥 뒤란 쪽으로 툇마루가 있고, 대청의 안쪽과 건넌방 전면에도 툇마루가 이어져 있다. 안방의 안쪽과 대청의 뒤편에는 쪽마루가 있다. 이처럼 툇마루와 쪽마루가 많이 나 있는 것은 내부와 외부 공간의 대립을 완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광복 후에 헐린 것을 1980년 문화재로 지정되고 나서 복원한 것이라 한다. 생가는 1980년 6월 2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벽계강당은 선생의 생전 설계 구상도대로 <화서집>을 참고하여 1999년에 축조한 것이다.  화서기념관은 생가 주변을 살아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에 지어졌다. 내부 전시실에는 선생의 친필을 비롯해 약 50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일하정(一何亭)의 현판 글씨, 프랑스와의 주전론을 주장한 상소 교지, 선생의 장자인 괴원공이 함께 천문을 연구하면서 그린 별자리인 성진도(星辰圖) 등이 있다.
마을에는 이항로 선생 생가 외에도 경기도기념물 제43호인 노산사(蘆山祠)가 있다. 선생이 생전에 경모하던 주희와 송시열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던 사당 터이자, 선생의 영정도 같이 모시고 있는 곳이다. 100여 평에 이르던 사당은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었고, 지금 있는 3칸의 작은 사당은 1954년 유림들이 이항로의 높은 덕행과 학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곳 뒤 언덕에는 선생의 묘가 있다. 묘비와 향로석, 동자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고, 비문에는 선생의 행적과 사상 등이 기록되어 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의 삶,
벼슬을 버리고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다

화서 이항로 선생은 1792년(정조 16)에 양평군 벽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며, 원래 이름은 광로(光老)였다.
선생은 3세 때 <천자문>을 배우고 6세 때는 <19사략>을 읽으면서 <천황지황변>을 저술할 정도로 영특하였다. 17세에는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당시 재상이 사람을 보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지내면 금년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하자 “선비로서 발 디딜 데가 못 된다”고 개탄하며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1세 때가 되어서 죽촌 이우신(李友信)을 찾아가 그 문하에 자주 드나들며 10년을 배웠다. 30대에 들어서는 뚜렷한 스승 없이 <사서>, <주자대전>, <송자대전> 등의 문헌을 중심으로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선생의 학식과 덕행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수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

진언을 두려워하지 않던 청렴한 선비,
위정척사 주장과 박은식, 김구 등 수많은 민족지도자 양성

선생은 75세가 되던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입궐하여 프랑스와 싸울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조선은 이양선의 출몰과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 문물의 급진적인 유입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때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서양 문물의 침투가 제국주의로 이어질 것을 꿰뚫고 있었던 듯,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위정척사 사상은 양헌수,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홍재구 등 화서학파에 의해 계승되어 구한말 항일 의병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이후 박은식, 김구, 조병준 등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생의 위정척사 사상은 한국 근대 민족 운동사의 뿌리이자 도화선으로서 무척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서양과 주전론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백성들에게 부역과 원납전을 강제 징수하는 실정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전면으로 비판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결국 흥선대원군에 의해 낙향하게 되었다. 이에 박주운, 박규서 등은 상소에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말 줄마저 끊어져 버렸다”며 한탄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1868년(고종 5)에 77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 이항로 선생 생가 관람 정보

주    소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화서1로 239
이용시간 하절기(3~10월) 09:30~18:00 / 동절기(11~2월) 09:30~17:00
입 장 료 무료
문    의 031-774-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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