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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무대 인생, 가수 이용이 쓰는 연예세상 ⑥
28년 무대 인생, 가수 이용이 쓰는 연예세상 ⑥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8.02.04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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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9일 일요일 밤 열한 시쯤에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 주 스케줄을 정리하고 있던 차에 휴대전화 벨이 울렸습니다. 가수 이자연 씨의 이름이 떠서 의아하게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자연 씨가 소리를 내어 울면서 “이용 씨, 박건호 선생님이 돌아가셨어. 엉엉”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슬픔 이상의 어떤 아픔을 느꼈습니다.
사실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 하는데, 떠난 분한테 이런 말씀을 드리기 정말 곤혹스럽지만 여기서라도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 히트곡 중 80%는 그분의 노랫말이기도 하지만 데뷔 이래로 28년 동안 그분과 뜨거운 인연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몇 년 사이에 그간 쌓아온 정을 무너뜨릴 만한 어떤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원수지간이나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건 아니고, 옛날에 비해 많이 소원해졌다는 뜻이지요.
부음을 전해 듣고 대충 급한 일만 마치고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기도를 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는데, 문상을 하고 나오다 미망인이 되신 형수님과 인사를 하는 순간엔 더 이상 억누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동안의 묘한 응어리가 풀어지면서 어떤 서러움 같은 슬픔이 복받치더군요. 어떤 경우도 죽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오해가 죽음으로 해결되거나 혹은 결국 미결로 남는 것 모두 저를 힘들게 합니다. 건호 형님과 저 사이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건호 형님은 제가 미국에 있는 4년 동안 두 번이나 절 찾아주셨어요. 그때마다 우리는 웨스트버지니아나 남쪽 플로리다로 여행을 많이 갔습니다. 제가 미국 생활 4년째 접어들자 “용아, 너 왜 여기서 이렇게 사느냐? 널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며 몇 번씩 유혹과 종용을 계속했죠. 귀국은 절대 안 한다고 마음먹었는데 형님의 계속되는 권유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아버님의 임종 때문에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건호 형님을 만나서 의지하게 되었고 4년 만에 귀국한 저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분이라서 형님의 말씀을 잘 따랐습니다.
“한국에서 활동을 해라, 옛날 같은 인기는 아니더라도 여기서 활동을 해야지, 가요계 그렇게 멀리 떠난 모습 마음 아프다”며 영구귀국을 재촉했습니다. 요즘은 귀국 후 19년 만에 소위 제2의 전성기니 뭐니 하는 말을 듣는데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 첫 단추를 잘 끼워주신 분이 건호 형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5년, 10년 동안 왜 그렇게 멀어졌는지 그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퀸 애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도 되지만 불과 며칠 전에 하늘나라에 가신 건호 형님에게 드리는 고해성사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장례식장에서 5분간 대성통곡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1988년 귀국해서 다음해 첫 앨범이 나오는 두세 달 동안 건호 형님이 제 음반의 모든 곡을 해주셨습니다. 그땐 친형제간 이상으로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셨죠. 그러나 앨범은 불발로 끝났고, 컴백도 힘들었습니다. 다시 저는 귀국하자마자 정리해야 할 문제로 많은 빚을 져서 할 수 없이 밤무대 생활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신곡은 시행착오구나’라고 단정짓고 5년여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또 건호 형님이 다시 도전해보자며 몇 곡 주시더군요. 하지만 그 앨범조차 불발로 끝나고 말았죠. 그 LP판은 우리 친척도 안 사주더군요.
또다시 국가대표 작사가인 박건호 씨의 모든 곡이 불발로 끝나고 만 거지요. 전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형님에게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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