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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사 김문수, 설난영 부부의 ‘세상 가장 낮은 곳’을 가리키는 삶의 나침반
경기도지사 김문수, 설난영 부부의 ‘세상 가장 낮은 곳’을 가리키는 삶의 나침반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8.05.1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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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아파트에 사는 3선 국회의원, 평생을 고소공포증 환자처럼 낮은 곳을 향해 달려간 삶"

아버지의 유산, ‘청렴’과 ‘성실’의 DNA
대한민국 그 어느 정치인보다도 바쁘게 사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만나는 일은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김 지사의 성실함은 과거 국회출입기자단과 시민단체 등이 선정한 ‘10년 연속 의정활동 및 국정감사 베스트 국회의원’ 시절부터 유명한 것이었다. ‘밤 12시가 넘어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언제나 가장 늦은 밤까지 사무실 불이 켜져 있었던 김 지사의 의원 시절이었다.
그런 김 지사를 공관에서 만나 인사와 명함을 나눴다. 역시나 첫 만남부터가 남다르다. 그간 다양한 직업군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명함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가 새겨진 정치인은 처음이다. 청년 시절 노동운동을 할 적부터 시작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의 삶은, 작은 명함 하나에도 예외가 없나 보다. 한번은 경기도지사로 부임한 후 한 측근이 “도지사 관사가 예전에는 나병환자 촌이었다”며 불평하자, “불쌍한 나병환자들을 위한 곳이었던 것이 뭐가 문제냐”며 호통을 친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김 지사는 지난 1981년 당시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었던 설난영 씨와 결혼, 슬하에 외동딸 동주 씨를 두고 있다. 동주 씨는 언제나 ‘세상 가장 낮은 곳을 향하라’는 부모의 뜻을 이어받아 현재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확실히 무엇을 ‘갖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에 익숙한 세 가족의 삶이다.
1951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김 지사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청렴’과 ‘성실’이다. 몰락한 양반 집안에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형제들 중 공부를 가장 잘해 어려서부터 ‘수재’라는 소리를 듣고 컸다. 비록 가세는 많이 기운 몰락한 양반 집안이었지만, 지고지순한 선비의 기품만은 변함없이 대물림되었다고 김 지사는 말한다. 술 담배는 일절 하지 않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곧은’ 성품 탓일까. 김 지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미,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하다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무기정학을 받는다. 올곧았지만, 너무나도 험난했던 그의 지난 시련의 길목이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 어떤 고고한 선비의 기품 같은 것은 대물림되었던 것 같습니다. 청렴하고 성실한, 자신의 안위보다 어려운 이들과 국가를 생각하는 이타적 삶에 대한 것들이죠. 아내는 종종 말합니다. ‘그 피가 지금 당신에게도 흐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3선 국회의원을 거치면서도 줄곧 수도권의 서민아파트에 살았던 김 지사는 국회의원 시절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로또의 최고 당첨금액을 낮추는 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뼈 속 깊이 아로새겨진 ‘청렴’과 ‘성실’의 DNA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남긴 밥을 보면 눈물이 난다
문중의 일을 도맡아 했던 아버지가 친척의 빚 보증을 서면서 안 그래도 기울어가던 가세는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싫어했던 것이 선생님의 가정방문이었습니다. 판잣집 단칸방에 산다는 사실이 어린 저로서는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죠.”
그러나 판잣집과 초가집에서 성장하며 김 지사가 가져야 했던 열등감은, 그가 한평생을 힘없고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살게끔 만든 동력이 되었다.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 노동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쌓게 된 그는, 돈이 없어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을 얻어 생활했던 용두동 판잣집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세우게 된다.
“당시 용두동엔 판잣집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아, 내가 어릴 때 살던 판잣집보다 훨씬 못한 곳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던 때였죠. 시커먼 냇물엔 인분이 둥둥 떠내려가고, 휑한 공동화장실은 젊은 처자들이 볼일을 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시골 촌놈에게 비춰졌던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서울의 이면에는 그렇게 왜소하고 음침한 곳도 있다는 것을, 이것은 결단코 사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죠.”
그다음 머물게 된 곳이 광주 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용두동 등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철거하며 이주민들을 모여 살게 했던 그곳은, 허허벌판에 텐트가 쫙 널려 있는 포로수용소 같았다. 산모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자기가 낳은 애를 삶아 식구들과 먹었다는 끔찍한 소문이 떠돌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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