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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송승환의 난타 탄생 11년 성공 스토리 & 프라이버시 인터뷰
배우 송승환의 난타 탄생 11년 성공 스토리 & 프라이버시 인터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8.12.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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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난타만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뮤지컬을
제작하고 있어요. 어떤 의미에선 늘 목이 마르죠”

세계를 사로잡은 퍼포먼스 공연 ‘난타’의 탄생 배경은 이미 방송과 언론을 통해 무수히 알려졌다. 그리고 그 성공 신화의 중심에는 송승환이 있었다. 그의 성공 비결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것. 무언가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도전정신과 남다른 일 욕심은 그를 오늘날 최고의 공연 제작자로 만들어놓았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이지만, 지금에 도달하기까지 그가 넘어야 했던 장애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0년 전 세계 공연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브로드웨이에 비해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공연계는 그의 새로운 시도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성공 확률이 높은 라이선스 공연에 비해 토종 창작공연은 투자자들에게 일종의 모험으로 다가왔던 것. 그러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던 그에게 금전적인 어려움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려움 끝에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그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한 것. 우여곡절 끝에 결국 주식회사 PMC프로덕션이 만들어졌고 ‘난타’ 성공 신화의 서막을 장식했다.

바쁜 공연 제작자로서의 일상, 삶에 카타르시스가 되는 연기
그가 연기를 시작한 것은 여덟 살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 때부터 쉰이 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는 천직이다. 최근 1년 6개월 만에 다시 브라운관을 찾게 된 그의 선택은 와인을 소재로 한 새 드라마 ‘떼루와’.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악역이라는 사실이다. 더없이 선한 인상의 그가 악역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이제까지 주로 착한 역할만 많이 맡아와서 이번에는 악역을 해보고 싶었어요. 기존의 제 모습과 달라서 재미있을 것 같았죠. 와인을 소재로 한다는 것도 신선했고요. 1년 6개월 만의 출연이지만, 그렇게 쉬었다는 느낌은 안 들어요. 다른 일을 안 하고 쉬었다면 감회가 남다를지도 모르지만, 공연 제작 일로 워낙 정신없이 바빠 가지고(웃음)….”
따지고 보면 공연 제작이라는 것도 연기자인 그가 택한 또 다른 형태의 예술활동. 사실 그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소규모의 연극을 만들며 연기와 제작을 병행해왔다. 제작자의 일이 더 바빠진 요즘, 그럼에도 그가 연기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이미 직업을 넘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기는 제 몸하고 붙어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제작자로 일하고 있지만, 드라마든 연극이든 1년에 한 번쯤은 꼭 하려고 하죠. 연기를 그만둘 수 없는 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데서 오는 저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거든요. 매번 그런 카타르시스를 맛보고 싶은 충동이 있죠.”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하지만, 제작자로서의 일도 늦출 수는 없다. 이미 ‘난타’가 성공을 한 만큼 내년에는 ‘난타 2’를 만들기 위한 준비도 같이 해나가야 한다. 다른 공연도 마찬가지. 12월에 뮤지컬 ‘젊음의 행진’을 비롯해 ‘달고나’, ‘형제는 용감했다’, ‘뮤직 인 마이 하트’, ‘호두까기인형’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유독 창작 뮤지컬만 고집하는 그. 그 이유는 한국 뮤지컬로 다시금 ‘난타’에 버금가는 명작을 탄생시키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수입되면서 국내 뮤지컬 시장 저변을 넓힌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때 할리우드 영화를 보다가 한국 영화가 더 사랑받은 점을 봤을 때, 뮤지컬도 곧 그런 시기가 오리라고 봐요. 라이선스 뮤지컬이 물론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확 와닿는 면은 부족하기 때문이죠. 관객들도 이제는 톰과 메리가 나오는 뮤지컬보다 철수와 영희가 나오는 토종 뮤지컬을 더 보고 싶어할 때가 됐어요. 한류를 통해 얻은 교훈은 아시아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거죠. 다행히 아시아에서 한국만큼 뮤지컬을 잘 만드는 나라가 없거든요. 제가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 이유는 한국 시장을 넘어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서예요.”

 
젊은 시절 감행한 뉴욕 유학 & 세상에서 제일 편한 아내
그가 ‘난타’의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었던 밑바탕은 오래전 감행했던 미국 뉴욕으로의 유학이었다. 1985년 당시 20대의 그는 이미 인기스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처음 미국 유학을 결심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로케 미니시리즈 ‘불타는 바다’의 주인공으로 첫 해외 나들이를 경험한 뒤였다. 이미 다른 세상을 본 그에게 현재의 인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해외를 나가보고 느낀 게 너무 많았어요. 제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유학을 결심했어요. 지금 안 가면 영원히 못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 들면 더 가기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 용기를 낸 거죠.”
그러나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부모가 사업에 실패해 집안 형편이 급격하게 기울었던 것. 결국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빈손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고생이 불 보듯 뻔한 유학길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4년가량 뉴욕에 살며 새롭게 보고 들은 것이 많았어요. 당시 뉴욕은 그야말로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고, 또 한국에 문화가 다양하지 못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그 시간은 제 인생에서 굉장히 좋은 기회였어요. 그런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난타’라는 공연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이 먹고사는 문제였다. 게다가 단둘이 약혼식을 하고 함께 떠난 아내도 있었다. 당시 뉴욕에서 공부를 하는 많은 유학생들처럼 그도 일을 해야만 했다. 공부를 위해 간 만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일을 찾은 그. 바로 벼룩시장으로 일컬어지는 ‘프리마켓’이었다.
“프리마켓에서 시계도 팔고 신발도 팔았어요. 또 한인방송에서 라디오 DJ 일도 하면서 공부를 했죠.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어요. 제가 사장이니까 장사를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됐으니까요(웃음).”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당시 함께 떠난 아내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어하기보다는 뉴욕에서의 삶을 즐겼던 아내.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은 늘 뒤따랐지만 부부에겐 젊음과 사랑이라는 최대의 무기가 있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단둘이 외국에 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두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면 로맨틱한 일이었어요. 또 외국생활에서 오는 이국적인 즐거움도 있었죠. 장사도 그렇고 모든 게 재미있기만 했어요. 뉴욕이란 도시 자체가 굉장히 역동적이기 때문에 즐길 거리도 많았고요. 남들이 볼 때는 어려워 보였는지 모르지만, 우리한테는 어쩌면 즐기면서 살아온 뉴욕생활이었죠(웃음).”
아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일 욕심이 많아 바쁜 그를 많이 이해해준다. 워낙 젊어서 만나 지금까지 살아온 터라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못해주는 것이 많지만 ‘난타’ 해외 공연차 외국을 나갈 일이 있으면 아내와의 동행 자체가 데이트나 마찬가지다.
“해외에 가면 어떨 땐 6박 7일 동안 아내와 꼭 붙어 있을 때도 있어요(웃음). 아내요? 집에서 살림하는 평범한 여자죠. 20년 이상 살았으니까 이제는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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