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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불암·시인 김지하, 50년 우정을 말하다
배우 최불암·시인 김지하, 50년 우정을 말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3.2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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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속에 꽃핀 인연’
배우 최불암·시인 김지하, 50년 우정을 말하다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겨온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배우 최불암과 시인 김지하가 그들이다. 어려운 시절, 한 사람은 민초들을 울고 웃게 만든 명배우로, 다른 한 사람은 시대를 대변하는 저항시인으로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왔다. 그러나 스무 살 무렵 처음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흘러 시대는 변했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취재_ 황정호 기자 사진_ 양우영 기자 장소제공_ 카페 리틀 차이나(02-720-2190)

 

“한 편의 시와 같은 삶을 살았던 배우,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던 시인의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지난 시간들”

아직 차가운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늦겨울, 인사동에서 마주한 최불암과 김지하는 오랜만의 만남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젊은 시절, 혼란한 시대를 함께한 두 사람이기에 서로에 대한 기억은 바로 어제 일처럼 다가오는 듯했다. 1960년, 4·19라는 혼돈의 시기에 20대 앳된 대학생이던 그들은 각 대학교 연극부 대표들에 의해 구성된 새생활계몽대 활동을 통해 처음 만났다. 이제 일흔의 종심(從心)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서로에 대한 각별함은 곰삭은 우정으로 더욱 진하게 남아 있다.
여전히 각자의 영역에서 존재감 있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두 사람. 그간 서로의 활동 모습은 지켜보고 있었지만 젊은 시절과 같이 함께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하기는 꼬박 10여 년 만이다. 그러나 세월이 무색한 듯, 반가움을 실어 다시 맞잡은 두 손은 두 사람을 그때 그 시절로 되돌려놓았다.

 
 

웃음을 머금은 채 떠올리는 ‘젊은 날의 초상’
“잘생긴 얼굴 오랜만에 보네. 어이구, 그간 몇 번씩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그러지 못했어(최불암).”
“이렇게 해서라도 보니 좋네(김지하).”
그간 먼발치에서 서로의 소식을 전해들었던 터라 쌓인 이야기가 많은 듯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 오랜만에 만나는 벗이 그렇듯, 그들 역시 건강과 자녀들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반가움을 풀어놓는다.
각자 최불암과 김지하라는 예명과 필명으로 활동해왔지만, 오래전 그들은 이십 대의 최영한과 김영일로 처음 만났다. 한국 현대사에 첫 혁명이었던 1960년 4·19 이후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지하는 서울대 미학과를 다니고 나는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다니고 있었지. 4·19를 계기로 새생활계몽대를 하면서 처음 본 거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유난히 눈에 띄기도 하고 잘생긴 호남형이었어. 웬만한 사람이 보면 반할 정도였지(웃음). 그렇게 처음 만난 날 얘기가 끝나고 사람들과 대학로 앞에 주점에서 술을 마셨는데 지금도 그 기억이 남아 있어(최불암).”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좁은 주점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두 사람. 그러나 김지하는 유독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몸에 번갈아 기대며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던 탓에 최불암 역시 잠을 못 자기는 마찬가지. 당시 주술을 외듯 이야기를 쏟아내는 김지하는 최불암의 눈에 특이한 친구로 여겨졌다.
“그때 지하가 내 품에 기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마치 마리아가 돼서 예수를 안고 있는 듯한 형상인 거야.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마치 주술을 외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결국 그러다 다시 술을 가지고 와서 마셨지(웃음). 왜 그때 이 친구가 잠을 못 잤을까. 식사도 잘 못하고 탈진한 상태였는데…. 아마 4·19 직후라서 뭔가 허탈했나 봐(최불암).”
“나는 그때 사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개똥철학인데(웃음)… 사람이 산다는 건 뭐고 잘 산다는 건 또 뭐냐, 잘 살려면 남하고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친구는 뭐고 애인은 뭐고 민족과 인류는 뭐냐, 또 그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였지. 고민은 깊어지고 그런 와중에 4·19가 펑 터진 거죠(김지하).”
4·19가 시작된 1960년 그날, 김지하는 시골집에서 새벽에 올라와 흑석동 외가에 있던 짐을 성북동에 마련한 자취방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이불 짐을 들고 나서는 그의 앞에 벌어진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이었고 이념과 사상이 결여된,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혁명의 모습이었다.
“나는 살기 위해 이불 짐을 지고 가는 건데, 일종의 핑계지만, 그 행동들은 확실한 방향성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에 비해서 나는 뭐냐는 생각이 있었지만, 당시 나에겐 가난한 살림에 돈 몇 푼을 얻어서 외가에서 독립해 사는 게 중요했지. 그런 고민 속에서 길을 가는데, 학교 앞을 지나가면서 만난 친구들이 나를 보고 의아해했어요. 평소 내 기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데모에 왜 참여 안 하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이건 이념도 철학도 없는 혁명이다. 반동이 오면 어떻게 할래’ 물었더니 조풍삼이란 친구가 ‘반동이 오면 그때 또 싸워야지’ 하더라고. 그게 내 기억에 평생 새겨져 있어(김지하).”
친구를 뒤로하고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는 그의 앞에 이번에는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쏟아져나왔다. 그와 함께 경찰의 총격이 시작됐다. 끝내 총알 속을 뚫고 성북동 자취방으로 가는 그의 마음은 갈등으로 소용돌이쳤다. 귓가에는 조풍삼의 말이 메아리로 울렸다. 1960년 4월 19일의 갈등은 이후 최불암과 만난 그날 주점에서까지 계속된 셈이다. 그가 새생활계몽대에 참여하게 된 이유도 그날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그에게 있어 새생활계몽대의 활동은 확실한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전국 각 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새생활계몽대는 외국 상품을 배척하고 국산품을 이용하자는 민족운동. 그곳에서 만난 두 사람은 여러 편의 선전 연극을 함께하며 점차 우정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때 찍은 사진이 아직도 우리 집에 있어(웃음). 제목이 아마 ‘달빛 있는 생신’이었을 거야. 그때 아마 원각사에서 황은진 씨가 연출을 하고 나랑 박근형이랑 지하가 같이 등장을 했지. 근데 당시에 지하는 어떤 자기 분노 같은 것에 부대끼는 것처럼 보였어. 내 기억엔 말이지, 뭔가 고민이 있는데 자기에 대한 설득이 안 되는 것 같았지. 그때 또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를 했어. 지하가 나보고 ‘어미가 자식을 낳을 때 태를 안 자른다는 상상을 해봤어’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전부 끈을 놓지 못하는 거지’ 하니까 ‘바로 그거야’ 그러더라고. 난 그게 풀리지 않는 숙제였어. ‘왜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하고…(최불암).”
갓 이십 대에 접어든 두 청년은 그렇게 시대의 고민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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