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30 16:05 (화)
 실시간뉴스
종교 넘어 시대의 등불, 김수환 추기경 87세로 선종(善終)
종교 넘어 시대의 등불, 김수환 추기경 87세로 선종(善終)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3.22 13: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실천하는 양심, 진정한 사랑을 가르치고 떠나다
종교 넘어 시대의 등불,
김수환 추기경 87세로 선종(善終)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지난 2월 16일 서울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가톨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나, 87년 생애를 신앙 속에서 살다 간 김 추기경은 지난해 9월 노환으로 입원한
뒤 호흡곤란으로 위중설이 돌았으나 선종 순간까지
스스로 호흡하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았다.

취재_ 김재우 기자 사진_ 서울신문 DB,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와 강자의 불의에는
단호하게 맞섰지만, 청빈한 삶과 따듯한 인간미로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우리 시대의 어른”

 
 
# 2월 16일, 무거운 삶의 십자가를 내려놓다
지난 2월 16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품안에서 선종했다”고 공식 발표하고, “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 않으셨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최종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 김 추기경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수환 추기경은 평소 주치의에게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을 위한 어떤 조치도 하지 말아달라”면서 “인공호흡기도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약속할 수 있느냐. 꼭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몇 번의 다짐까지 받아내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생명윤리를 강조하며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을 우려했다.

 
지난해 9월 11일, 서울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 김수환 추기경. 이미 그 이전부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상황이었다. 입원 20여 일 만에 한 차례 위기를 겪었던 김 추기경은 지난해 10월 4일 병세가 갑자기 악화됐다. 기관지염으로 가래가 찼고, 잘 뱉어내지 못했다. 호흡곤란 때문에 혈액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의식까지 잃을 정도였다. 김 추기경은 이 상황에서도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리고 11월과 12월 말에도 위기가 찾아왔지만 김 추기경은 늘 극적으로 회복하고, 성탄절 미사 때는 두 시간 이상을 앉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지막 위기 이후 기력이 극도로 저하돼 선종을 서서히 예고했다.
선종 3주 전부터 아예 침대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 김 추기경은 선종 하루 전날, 주치의와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정신만은 놓지 않으려 했다. “많이 힘드시죠”란 물음에 추기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는 것. 그리고 오후 6시가 넘어 추기경은 무거운 삶의 십자가를 내려놓았다.
마지막 표정은 평온했다. 산소호흡기와 심폐소생술, 진통제도 없이 스스로 숨을 내쉬다가 온전한 정신으로 주어진 삶을 고요히 마친 것이다.
유언에 따라 선종 30여 분 만에 안구를 기증하기 위한 적출수술이 시작됐다. 여섯 개의 근육과 시신경을 절단하는 큰 수술이었지만 40여 분 만에 끝이 났다. 2001년 백내장 수술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각막 상태는 매우 좋았다. 안구가 없는 자리에는 의안(義眼)으로 대신했다. 추기경의 각막은 두 사람에게 이식이 됐다. 기증 받는 사람의 기준은 없었다. 순서에 따라 누구한테 이식됐는지는 비밀이다. 이 또한 김 추기경의 뜻이기도 하다.
밤 9시. 신부와 수녀 20여 명이 병실에 모였다. 영면한 김 추기경의 침상 주변에서 조촐한 사망 미사를 열었다. 평소 미사를 집전할 때 입었던 제의를 다시 입은 김수환 추기경. 하나 이제 김 추기경은 미사를 올리는 대신 평온히 두 눈을 감았다. 밤 9시 15분. 하얀 천으로 덮인 추기경의 시신이 병원을 나서고 곧이어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신도들은 마지막으로 추기경의 발끝이라도 닿아보겠다며 손을 뻗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대신했다. 신도들의 슬픔을 뒤로하고,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은 성당 제대 앞 유리관에 안치됐다.
2월 20일 오전에 거행된 장례미사 이후 김 추기경은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날 치러진 장례미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삶을 시작하는 이를 위한 파스카적 성격,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써 완전히 끝나고 허무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이 있음을 믿는다. 이것이 가톨릭 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부활 신앙’이다.
 

#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
하느님의 종, 시대의 양심 그리고 혜화동 할아버지. 어떻게 부르든 김수환 추기경의 87년 인생은 오롯이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웃을 위한 것이었다. 용기 있는 발언으로, 때로는 무거운 침묵을 지켜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온 시대의 어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대구 남산동에서 병인박해로 순교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아버지 김영석 씨와 어머니 서중하 씨 슬하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옹기점과 농업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부모 밑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자랐지만 원래 사제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나 남달리 자식에게 열정을 가진 모친은 그가 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권했고, 보통학교 5학년을 마친 후 김 추기경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 동성상업고등학교 신학교 과정에 진학한 김 추기경은 공부가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하는 평범한 학생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