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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품은 ‘피겨 퀸’ 김연아의 ‘아주 특별한 만남’
세계를 품은 ‘피겨 퀸’ 김연아의 ‘아주 특별한 만남’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5.20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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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도전

피겨를 사랑한 요정의 야무진 ‘Success Story’
‘국민요정’에서
‘여제(女帝)’로 세계를 품은
 ‘피겨 퀸’ 김연아
 

‘요정’이 ‘여왕’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여자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2백 점을 돌파한 최초의 선수,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한국인 김연아. ‘피겨 신동’에서 ‘국민 영웅’, 마침내는 ‘세계 피겨사의 신화’가 되었다. 일곱 살 때 처음 스케이트화를 신은 뒤 가슴속에 품어온 ‘세계 챔피언’의 꿈을 마침내 이룬 것이다.

취재_ 이시종 기자  사진_ 우미진(프리랜서)·매거진플러스 DB·서울신문 DB


"부담감은 있었지만 제가 연습한 만큼 다 보여드린 것 같아요. 올림픽에서도 제가 갖고 있는 실력을 빙판 위에서 모두 펼치고 싶어요"


이제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다시 만난 김연아는 여전히 앳된 모습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이날 김연아는 검은색 연습복 차림으로 며칠 후 있을 아이스쇼를 위해 경쾌한 음악에 맞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김연아는 비트가 빠르고 강한 미국의 팝스타 리한나의 ‘돈 스톱 더 뮤직’을 배경음악으로 새로운 갈라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그동안 피겨 요정 이미지의 깜찍함이나 우아함이 아닌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모습이었다. 손과 팔 동작에서는 관능미가 넘쳤고,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스텝과 두 다리를 크게 벌리고 도약하는 스플리트 점프로 더욱 역동성이 느껴졌다. 정열적인 연기를 선보이던 김연아는 음악이 꺼지자 다시 열아홉 살 소녀로 돌아왔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 등장한 ‘피겨 신동’
13년 전 얼음을 마냥 좋아하던 소녀. 만화영화 대신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비디오 보기를 좋아한 소녀. 그 소녀가 ‘피겨 여왕’이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여왕’은 첫 등장부터 화려했다. 일찌감치 ‘피겨 신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 초등학교 때 여섯 가지 점프 기술 가운데 악셀을 제외한 다섯 가지 트리플 점프를 뛰며 척박한 한국 빙상계의 불꽃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04년 9월 ISU 주니어 그랑프리 2차 대회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우승, 한국 피겨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같은 해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뒤 다음해인 2005∼2006 시즌부터 본격적인 ‘김연아 시대’를 열어갔다.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를 두 차례 석권한 김연아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에 이어 2006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정상까지 차지, 4개 대회 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쌓으며 세계주니어대회를 평정했다.
무대를 시니어로 옮기고 나서도 김연아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아픈 허리를 이끌고 출전한 2006년 12월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라이벌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를 제치고 우승했으며, 2007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또 2007년 그랑프리 파이널을 2연패한데 이어 2008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회 연속 동메달을 따내며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피겨 퀸’이란 성공 뒤에 숨은 눈물  
피겨스케이팅 선수를 위해 제대로 된 빙상장 하나 없던 한국에서 김연아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하루 6번. 1년에 1천8백 번. 김연아가 1년에 휴일을 뺀 3백 일 동안 점프를 하면서 넘어진 횟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진작 포기하고도 남았을 고통이다. 김연아는 그만큼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김연아가 주니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2006년 5월. 연습을 너무 많이 하는 탓에 4개월은 신어야 하는 스케이트화가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닳기 일쑤였다. 매주 새로 스케이트화를 사는 데 지친 김연아의 어머니는 “은퇴해야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다행히 그해 12월 그랑프리 파이널대회에서 첫 우승한 뒤, 스케이트화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회사가 나타나면서 부담을 덜어냈다.
주니어 시절 김연아를 가르쳤던 신혜숙 코치는 김연아를 지독한 ‘연습벌레’로 기억하고 있다. 신 코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연아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트리플 러츠를 하도 많이 뛰어서 헤아려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65회까지 헤아리고 포기했죠. 다른 선수들은 같은 시간에 그 반도 못 뛰거든요.”
노력 이외에도 김연아의 성공 뒤에는 시기 적절한 투자가 있었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선수들이 ‘돈’으로 고생을 많이 한다. 세계선수권대회와 같은 해외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여행경비를 자비로 충당해야 하며, 코치 비용 등으로도 많은 돈이 들어간다. 이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선수도 많다. 김연아도 한때 운동을 포기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금 도금업을 하는 아버지가 외환위기 당시 직격탄을 맞아 은퇴할 상황에 처했는데, 김연아는 이 무렵 슬럼프에 빠지며 은퇴를 결심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갔던 전국체전에서 완벽에 가까운 기량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중학교 2학년 때는 그랑프리에 출전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국제대회 우승 이후 김연아의 부모는 딸의 장래성을 내다보고 과감한 투자를 결심했다. 또 2006년 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이후 매니지먼트사, 스폰서사와 계약이 이루어지면서 김연아는 금전적인 어려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부상의 악몽 떨치고 보여준 ‘환상의 연기’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무리한 연습과 맞지 않은 부츠 탓에 부상이 온 것. 2006년에는 허리 부상 등으로 운동을 계속하기 힘들 정도였다. 부상은 중요한 순간마다 김연아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특히 2007년과 2008년 세계선수권대회는 김연아에게는 아쉬운 대회였다. 2007년 대회에서는 쇼트프로그램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해 금메달의 꿈을 키웠지만 엉치뼈 부상과 허리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프리스케이팅에서 두 차례 엉덩방아를 찧었으며, 2008년 대회에서는 갑작스런 고관절 부상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출전해야만 했다.

이런 악연 때문인지 이번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는 부담감이 매우 컸다. 김연아는 우승 후 미니홈피에 이런 긴장감을 털어놓기도 했다.
 “제가 왜 괜한 걱정을 했을까요. 왜 겁을 냈을까요. 이번 대회는 어느 때보다 간절했는데, 제 인생을 건 일이었는데, 월드타이틀을 또다시 놓치면 어쩌나, 설마 이번에도… 이런 생각을 수없이 했습니다. 잘하고 있어도, 잘할 자신이 있어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아무리 담담한 성격이라지만 아직은 사람들의 기대가 버겁게 느껴질 수 있는 열아홉 살 어린 소녀다. 그러나 김연아는 이번 대회 우승으로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에 조금 그런 생각을 떨쳐낸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한 대로, 상상한 대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제가 원하는 자리로 올라가고 있는 느낌이에요. ‘지난날들의 시련이 오늘의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김연아의 성공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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