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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어린시절)책을 좋아던 꼬마 시를 ..
(명사의 어린시절)책을 좋아던 꼬마 시를 ..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7.24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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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나 글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호기심이 참 많았던 소년이었지요"


시인에게 추억이 많다는 것은 글감이 많다는 것을 의미할 터. 또렷한 기억이 아니라도 어렴풋 떠오르는 풍경과 감정은 시인에게 영감을 선물한다. ‘농무’를 비롯해 1970∼80년대 농촌의 현실을 담은 참여시를 다수 발표했던 시인 신경림이 얼마 전 자전 에세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를 펴냈다. 누군가의 흥미를 끌 정도로 화려한 것도, 굴곡이 많았던 삶도 아니기에 수없이 망설인 글이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과 함께 옛 시절을 추억하고 싶었다. 시골의 흙냄새를 맡으며 책읽기에 흠뻑 빠져들었던 유년,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해방 전후를 보낸 똘똘하고 영특한 소년
충북 충주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아주 작은 시골, 남자아이가 귀한 시절에 신경림은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교육열이 높았던 할아버지와 어머니 덕에 책과 가깝게 지냈다. 키가 작아 맨 앞자리에 앉은 초등학교 시절에는 똘똘하고 영특해 담임교사의 귀염을 독차지했다. 연말 학예회 때는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쥐 병정들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었어요. 연습 때는 곧잘 해냈는데 막상 무대에서는 당황해서 큰 실수를 했어요. 소품을 머리에 이고 가야 하는데 손에 들고 무대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죠. 지금 떠올려봐도 눈앞이 캄캄하네요(웃음).”
3학년 때 담임교사도 잊을 수가 없다. 학교를 갓 졸업한 신참 여교사였는데 아이들이 떠들면 회초리로 교탁을 치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국어시간에는 동화를 읽어주곤 하던 담임의 목소리를 아이들은 참으로 좋아했다.
“선생님이 읽어준 동화에는 기차를 타고 우주를 달리는 등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아마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였을 거예요. 동시도 종종 읽어줬는데 누구의 시인지는 모르지만 ‘만지는 두 손에 아침 이슬’ 같은 구절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을 데리고 냇가나 산으로도 자주 나갔고, 고무신 가게와 붙어 있는 자취방에도 곧잘 데리고 갔어요. 아이들이 각자 쌀을 추렴해 선생님께 떡 한 시루를 해준 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병정놀이에 열중하기도 하고 새로 전학 온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얼굴이 희고 음색이 맑았던 소녀의 집을 찾아 4킬로미터를 걸은 기억도 있다. 짓궂은 친구가 그 소녀를 부르자 혼비백산 도망친 일은 두고두고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집과 학교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시절.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아이들의 마음도 산란했다. 세상은 온통 소문으로 흉흉했고 학교도 공부도 점점 뒷전이 되어갔다. 아이들은 노력봉사라고 해서 벼 베기, 보리밟기, 모 심기를 다녔다. 생활필수품도 귀할 대로 귀해져 램프 대신 들기름 등잔이 등장했고, 옷도 너덜너덜 기운 것밖에 차지가 오지 않았다. 한번은 밤중에 할머니가 깨워 일어나 보니 물사발이 눈앞에 보였다.
“면에 다니는 당숙네 집에 갔다가 설탕물을 타주는데 차마 혼자 마실 수 없어 염치불구하고 들고 오신 거죠. 고무신도 구할 수 없어서 모든 아이들 신이 왜나막신으로 통일된 시절이었어요. 툭하면 벗겨지는 그 왜나막신을 신고 새끼로 둘둘 말아 만든 공을 찼죠.”
할머니와 삼촌이 하던 국수틀집도 문을 닫았다. 손님도 없었거니와 그보다 먼저 기계인 쇠붙이가 남김없이 징발당했기 때문이다. 징용 갈 나이였던 삼촌은 산으로 도망을 갔다가 한참 만에야 돌아오기도 했다.

한글선생 맡게 된 꼬마훈장
해방 후 학교에서는 한글 교육에 열중했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일본말은 절대로 쓰지 말 것을 강조했다. 새 학기에 들어서는 모든 과목이 중지되고 국어만 공부하는 비상 교육이 시작됐다.
“한글을 일찍 깨친 건 어머니와 삼촌 덕이 컸죠. 눈에 띄는 물건이며 나무 따위에 ‘의자’니 ‘대추나무’니 하고 이름을 써 붙이는 극성을 부렸으니까요. 그 바람에 저는 두 살 어린 동생과 함께 면내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습니다. 이후에는 삼촌이나 아버지가 출장을 가거나 하면 어김없이 저와 동생이 읽을 만한 책을 사왔지요.”
해방이 되면서 사라졌던 장도 다시 열리기 시작했는데, 책을 살 수 있는 즐거움 때문에 장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잡화전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책전에는 어른들 책 사이사이로 아이들 책이 빠끔히 그에게 손짓했다. 아이들 책이라면 덮어놓고 사들였다. 시커먼 말똥종이에 글자도 잘 보이지 않는 책이었지만 수북하게 쌓여가는 책을 보면 그렇게나 뿌듯할 수가 없었다.
“책 읽는 재미를 붙인 게 아마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아버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할머니까지 책값이라면 아끼지 않았죠. 나중에는 책을 산다는 핑계로 용돈을 타서 군것질을 하는 버릇까지 생겼으니까요.”
삼십여 호로 이뤄진 마을에는 한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웃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은 어쩌다 ‘삐라’ 같은 것이라도 주우면 그의 집으로 달려왔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앞서 그가 글을 읽어주면 재주가 대단하다며 감탄을 했다.
그는 집에 굴러다니던 이광수의 ‘흙’을 내용도 잘 모른 채 통독을 하고, 한문이 잔뜩 섞인 최남선의 ‘조선역사’를 떠듬떠듬 읽어내 삼촌에게 용돈을 타기도 했다. 그 돈으로 장날 책전에서 처음 산 책이 현덕의 동화집 ‘포도와 구슬’이었다. 서울의 뒷골목 이야기를 읽으며 시골에서 태어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한 귀여운 소년이었다.
그렇게 4학년을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이하던 날, 그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방학 동안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한글을 가르치기로 한 것. 삼촌은 한글 강습을 하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을에서 가장 넓은 당숙네 사랑방을 강의실로 쓸 수 있게 도와줬다.
“마을 사람들과 소작인들, 이웃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모두 초청했는데 막상 개강하는 날 사랑방에 온 사람들은 십여 명에 지나지 않았어요. 말 그대로 ㄱ, 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꽤 열심히 가르쳤죠. 종일 논일, 밭일에 시달리다 온 분들이라서 삼십 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래도 중단하지 않고 방학이 끝날 때까지 계속했는데 아마 복순이 엄마와 우리 집 아이보기였던 복례 누나 덕이었을 거예요. 복순이 엄마는 저를 ‘학생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사람들이 한글을 조금씩 깨칠 때마다 ‘꼬마 훈장’ 신경림은 퍽 행복했다. 특히 복례 누나가 그의 방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하나둘 빼내 보는 것을 보면서 뿌듯한 기분도 만끽했다.
책꽂이에 책이 꽉 찰 무렵, 그의 마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해방이 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금광 덕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다. 그 후로는 밤늦도록 환하게 불을 밝히고 웅성웅성 떠드는 집이 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버지는 읍내에 나가 라디오를 사왔다. 지금의 TV만큼이나 커다란 크기였다. 그의 집 안방은 동네 사람들의 마실방이 됐고, 그는 다섯 시만 되면 쪼르르 집에 들어왔다.
“‘똘똘이의 모험’이라는 어린이 연속방송극을 참 좋아했어요. 남태평양 어느 섬에 상륙해서 벌이는 모험담, 도깨비감투를 쓰고 벌이는 활극들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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