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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준비위 대변인으로 변신한 손지애 전 CNN 서울지국장
G20 준비위 대변인으로 변신한 손지애 전 CNN 서울지국장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3.1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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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 ‘한국말 잘 하시네요’ 깜짝 놀라는 사람들 많아… 영어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창이죠”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의 외신 담당 대변인으로서 그녀는 오는 11월 11일~12일에 치러질 행사를 위해 전 세계에서 서울을 찾는 외신기자를 담당하게 된다. 세계 주요 20개국의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국제적인 행사 인만큼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온통 이곳으로 쏠릴 예정이다. 손지애 대변인은 약 3천여명의 외신기자의 취재를 지원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된다

한국이 제대로 평가받도록 역할을 하고 싶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영어 경제전문잡지 ‘Business Korea’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뉴욕타임스 특파원을 거쳐 1995년 CNN에 입사했고, 15년이 넘는 세월을 한국을 알리는 ‘얼굴’로 활약해왔다. 그러던 그녀가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시간 일을 하다 보니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계속 있었어요. 지난해에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 진학한 일이나 이화여대에서 겸임 교수로 강의를 한 것도 새로움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죠. 대변인 제의를 받고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했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하던 제가 정부 기관의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어요. 하지만 다른 행사도 아닌 ‘G20 정상회의’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어요. 왠지  어려울 것 같고, 해야 할 일도 많을 것 같잖아요. 일에 푹 빠져 살 수 있을 것 같았죠(웃음).”
공직으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아무래도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고. CNN의 경우 전 세계에 걸쳐있다 보니 조직자체는 크지만 서울의 특파원으로서는 혼자 지내야했다. 요즘은 칼 같은 출퇴근 시간부터 수없이 열리는 회의까지, 공직 생활에 한창 적응 중이라는 손지애 대변인은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코피도 한번 흘렸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1월 말로 사직한 CNN은 그녀가 15년을 보냈던 곳이다. 특파원으로서 처음 맡았던 뉴스는 바로 1995년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 서울 지국 오픈을 며칠 앞두고 발생한 대형 사고에 정신없이 비극의 현장에 달려가야 했다. 그녀의 마지막 보도는 지난 1월 북한의 서해 미사일 발포 사건이다. 처음과 마지막의 뉴스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지난 15년간 그녀는 한국의 수많은 사고와 북한 관련 뉴스를 세계에 타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느껴야하는 아쉬움도 컸다.
“외국의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 언론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뉴스를 쫓아야했어요. 그것이 저의 가장 큰 임무이니까요. 그러다보니 건물이 무너지고, 가스관이 폭발하고, 남대문에 화재가 나고, 북핵 문제로 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뉴스들을 주로 보도했죠. 한국의 문화나 경제를 알리기에는 외국 언론의 관심도 적었고, 시간적 여력도 부족했어요. 워낙 북한의 뉴스 가치가 높다보니 한국보다는 북한 관련 뉴스 위주로 리포팅을 해야 했고요.”
‘왜 우리나라에 대해 이렇게밖에 보도할 수 없을까’라는 답답함을 느껴왔기에 이번 G20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의 저력이 전 세계에서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라고 있는 그녀다. 기자가 아닌, 그 반대편에서 한국에 대한 ‘다른 뉴스’가 나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가득했다.

영어에 푹 빠져 살았던 어린 시절
‘영어 공부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거치는 것이 바로 CNN뉴스 청취다. 늘 CNN 뉴스에 등장해 유창한 영어로 한국의 소식을 전한 손지애 대변인은 그야말로 ‘영어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녀가 초등학생 시절 4년간 미국에 살았던 경험을 제외하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국내에서 마친 순수 국내파라는 것이다. 유창한 영어실력은 오랜 시간에 걸친 치열한 노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절 처음 만나는 분들이 ‘어머, 한국말 굉장히 잘하시네요’라고 놀라는 경우가 많아요. 아예 처음부터 영어로 말을 하는 분도 있고요. 뉴스에서 늘 영어를 쓰는 모습만 보며 절 교포 출신으로 착각하는 분이 많더라고요(웃음).”
손지애 대변인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경제 참사관으로 파견근무를 나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4년간 미국 워싱턴DC 인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영어가 능통한 부모는 네 딸이 빨리 미국생활에 적응하도록 집안에서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전 굉장히 쉽고 자연스럽게 영어를 받아들였어요. 공부해본 기억이 없고 그냥 익혔거든요.고만 고만한 또래의 세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죠. 미국에 가서는 자연스럽게 온 가족의 언어가 영어로 바뀌었어요. 나중에 한국에 들어온 후에는 한국말을 잊어버려서 오히려 더 고생했을 정도지요.”
어린 시절의 해외 체류 경험이 중·고교시절 영어에 두각을 나타낸 배경이 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영어’에 대한 그녀의 욕심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한국말을 익히면서 빠르게 영어를 잊어버린 동생들과 달리 그녀는 영어 실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저희 부모님은 미국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으셨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으셨어요(웃음). 중학교 3학년쯤 되니 영어 성적은 곧잘 나왔지만 예전처럼 영어를 유창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에 ‘영어는 부모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고, 다른 사람보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무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영어인데,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으로 그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죠.”
당시 영어를 접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이든 다 했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교의 영자신문 기자로 활약했고, 원서 토론반, 영어회화 클럽 등에서 활동했다.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서 수상도 했고, 틈이 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 영자신문과 영어책을 읽었다. AFKN 방송을 보면서 영어의 감을 키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쌓아간 실력으로 고등학생 때부터 이웃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을 정도로 영어에 푹 빠져 살았다.
“영자신문 기자를 하고, 영어 말하기 대회를 나가고, 영어회화 클럽 활동을 하며 끝없이 무언가를 했던 것은 제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었어요.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죠. 그때만 해도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자료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요즘은 자료들이 너무나 많아져서 사람들이 오히려 안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학창시절, 영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구체적으로 미래의 꿈을 그려본 적은 없었다. 워낙 책읽기를 좋아하니 뛰어난 한국 소설들을 번역해 노벨상에 도전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봤던 정도다. 하지만 활동적인 성격 덕분에 가만히 앉아 번역을 하는 일이 영 답답했다는 손지애 대변인. 사람을 만나는 일을 좋아하고, 영어 글쓰기에도 자신이 있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기자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영어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인 영어 경제전문잡지 ‘Business Korea’에서 손지애 대변인은 평생의 동반자인 남편 이병종 뉴스위크 국장을 만났다. 올해로 결혼 21년째를 맞는 그녀는 결혼 이후 계속 시부모를 모시고 함께 살아왔다. 시아버지의 별세 이후 지금은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과 세 딸 총 일곱 식구가 함께 산다.
“‘모시고 살았다’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찔리네요(웃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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