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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무소유의 세계로 돌아간 법정 스님 속세에 큰 가르침 남기고 간 어른의 말씀…
완전한 무소유의 세계로 돌아간 법정 스님 속세에 큰 가르침 남기고 간 어른의 말씀…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4.0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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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스님은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은 어린 시절 일찍 세상을 떠났고, 스님은 목포상고를 거쳐 전남대 상학과를 다녔다. 그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일순간에 피로 덮인 상흔을 접한 스님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집을 나섰다. 그때는 고국을 버린 망명자 같은 심정이었다고, 훗날 스님은 회고했다.
가능한 한 고향과 거리가 먼 곳, 그리고 오대산을 향했다. 하지만 폭설로 인해 길이 막혔고, 서울의 선학원에서 당대 선승인 효봉(1888∼1966) 스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먹물 빛깔의 승복을 받고서는 자신에게 꼭 맞는 듯한 기분을 감지한 스님. 이튿날 경남 통영의 미래사로 내려가 출가자의 삶을 시작했다. 1959년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던 스님은 이후 해인사 선원과 통도사를 거쳐, 1960년대 말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는 가장 빠른 시간과 경로를 통해 우리말과 불교 교리의 긴 여정을 관통하는 작업인 셈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스님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문재(文才)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모국어를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며, 1972년 첫 산문집 ‘영혼의 모음’을 출간했다. 1973년에는 대한불교신문 주필을 맡으며 세상일에 많은 목소리를 냈다. 유신철폐개헌운동에 서명했고, 권력의 폭력에 맞선 ‘씨알의 소리’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억압에 굴복한 세상의 침묵 앞에서 자신의 글과 행동으로 그 뜻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스님은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6년 4월, 스님의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세상에 내놓으며,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연이어 출간했다. 아마도 이때부터였을까. 스님은 종교를 넘어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까지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스님은 1992년부터는 아예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지냈다. 세상과의 단절을 시작했다. 1994년에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펼치면서 또다시 세상에 의미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에는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 받아 이듬해 길상사를 개원한 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길상사’ 창건 법회에서는 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두 어른의 만남’이라는 세상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스님은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 미사에 참석했고, 이후 종교는 세상의 미움과 다툼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장익 주교, 이해인 수녀 등 종교를 넘어서는 교유를 이어가기도 했다.

무소유의 그 유언

스님은 1971년 ‘미리 쓰는 유언’이란 글을 썼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동화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남기는 말>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2010년 2월 24일 법정 속명 박재철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박재철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

우리 시대 어른은 그렇게 갔다. 입적(入寂)…. 법정(法頂) 스님은 고요한 열반의 세계로 들어갔다. 유품은 머리맡의 책 몇 권. 30년 전에 미리 써둔 유서대로 신문 배달하는 이에게 남겼다. 그리고 남은 것은 위대한 침묵…. 무소유로 살다 간 한 수행자의 삶.
자본주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살아갈 재간은 모두에게 쉽지 않다. 스님처럼 완전한 버림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불가능하지만 무소유가 주는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소유의 절제, 과욕 내려놓기, 남의 것 찬탈 안 하기, 욕망의 정화….
버리면 버릴수록 더 갖게 되는 법을 스님은 더 잘 알고 있었을까. 살아오면서 비워라, 내려놓아라, 마음이 텅 빈 자는 천국이 너희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세상에 주문을 해왔다. ‘작은 것을 버리면 큰 것을 얻고, 적은 것에 연연하면 큰 것도 얻지 못한다’는 흔한 진리.
스님은 불교계에서도 어른 스님이었지만 천주교나 개신교, 원불교 등 이웃 종교에 대해 담을 쌓지 않았다. 지난해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아름다운 종교 화합의 모습을 보였던 스님은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천주교의 수녀원과 수도원에서도 자주 강연했고, 스님의 산문집과 경전 번역서들은 수녀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생전에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눴던 이해인 수녀는 법정 스님을 그리워하며 추모글을 보내왔다. 이 글만 봐도 법정 스님의 평소 모습과 마음, 그리고 사람을 대했던 그 깊은 곳에 빠질 수 있으리라.(??)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 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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