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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그 후 10년 또 다른 꿈을 꾸는 서진규 박사의 오늘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그 후 10년 또 다른 꿈을 꾸는 서진규 박사의 오늘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6.14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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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체가 희망의 증거였던 서진규 박사. 2006년 하버드대학원에서 국제외교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이는 요즘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강연과 저술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지핀 ‘희망의 등불’에 의지해 끝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았던 지난 이야기를 많은 이들과 나누며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내 삶을 이끈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 하나
1948년 경남 동래군 어촌에서 4남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난 서진규 박사. 엿장수 아버지를 둔 그이는 가난을 견디다 못해 주점을 차린 어머니의 일을 거들면서 자랐다. 어머니는 아들과 딸의 차별이 극심했고, 그이는 어린 마음에 반발심을 품었다. 서진규 박사는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어머니”라고 단언했다. 초등학생 시절, 언니가 시집간 이후부터 모든 살림은 그이의 몫이 됐고, 때때로 어머니의 술주정을 겪으며 상처가 쌓여갔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오빠를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종거리며 집안일을 하려니 어린 마음에도 억울했죠. 워낙 겁이 많았기 때문에 반항 한번 제대로 못했지만, 속으로는 분노와 오기가 쌓였어요. ‘가스나는 쓸데도 없다’는 말로 어머니가 무시할 때마다 ‘두고 봐라. 난 큰 인물이 될 거다’라고 속으로 되뇌었죠. 어머니가 나를 강인하게 키우지 않았으면 성공하려는 결심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데 만족했을 거예요.”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에 도전한 것도 어린 시절 선생님의 이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그이. “공부 잘해서 박사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던 선생님의 말이 평생 가슴 깊이 박혀 있다가 끝내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도전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
시골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던 그이는 서울 풍문여고로 유학을 왔지만, 오빠의 대학 입시와 겹치면서 끝내 대학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졸업 이후에는 가발공장 직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발공장에서 가발을 붙들고 앉아서 만들 때의 그 좌절감이 생생해요. 그 일을 싫어했고, 제대로 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늘 울기 일쑤였어요. 참 가난하고 배고팠고요. 삶의 끝이 암흑으로만 보여서 ‘죽자’는 생각도 자주 떠올랐어요. 골프장 식당에서 일할 때는 배는 고프지 않았는데, 열등의식 때문에 힘들었어요. 가발공장에는 주변이 다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는데, 당시 골프장에 오는 손님들은 다 상류층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종업원인 저 같은 사람은 무시하는 경우도 많아서 마치 ‘밑바닥 인생’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결정적으로 첫사랑에 실연하며 큰 상처를 받은 그이는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1971년
‘미국 가정에서 일할 식모를 구한다’는 신문광고에 운명을 걸고 단돈 1백 달러를 쥔 채 한국을 떠났다. 운 좋게 가정부 대신 한식당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고, 꼬박꼬박 모은 돈으로 꿈에 그리던 ‘대학생’도 됐다. 하지만 결혼은 그이의 삶을 온통 뒤바꿔놓았다. 1975년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한 그이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고, 이듬해 남편과 떨어져 있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 육군에 사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생후 8개월인 딸은 한국의 친정으로 보낸 이후였다.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그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삶이 힘들어서 6개월간 훈련을 받는 군인의 길을 선택했죠. 어떤 포부나 꿈을 갖고 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제가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돌파구였어요. 하지만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저를 데리고 계셨던 작은아버지 영향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아요. 군 장교였던 작은아버지는 가끔 파티에 참석할 때면 정복을 멋지게 차려입으셨죠. 곱게 정장을 차려입은 작은어머니의 모습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제가 선망했던 것은 늘 작은아버지의 모습이었어요. 저 스스로 성취를 이루고 싶었거든요.”
남편의 폭력, 하지만 쉽사리 연을 끊지도 못하는 끈질긴 애증. 스스로를 격리하는 마음으로 입대한 군대였다. 당시 그이는 딸을 낳은 지 여덟 달밖에 안 된 상태인 데다 입대 직전 유산을 하게 된 만신창이의 몸이라 보병훈련을 받으면서도 신체적으로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이는 이를 악물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청소, 빨래 등의 강점을 발휘해 다른 이들을 도와주고, 훈련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훈련병 생활에 적응했다. 그리고 스물여덟의 나이로 열 살이나 어린 사람들과 경쟁에서 두각을 보이며 보병훈련병 2백 명 중에 1등으로 졸업하는 기록을 세웠다.
군 입대 후에도 남편과의 관계는 끊어질 듯 다시 이어졌고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가정폭력의 그늘 아래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끝내 이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군 생활은 그이의 삶 자체가 되어버렸다. 일반사병으로 입대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격시험을 거쳐 장교가 됐다. 그후 한국, 미국, 독일의 근무지를 오가며 20여 년간 군인의 삶을 살았다.
군 장교였던 두 번째 남편이 그이가 한국에서 입양한 양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이혼하는 시련도 겪었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결혼 후 놓았던 학업도 재개했다.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6개 대학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 입학 15년 만인 1987년 학사모를 썼다. 대위로 복무 중이던 1990년에는 42세의 나이에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에도 도전했다. 업무상 필요를 위해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공부의 기쁨에 눈을 뜬 그이는 1996년 군인의 삶을 포기하고 박사과정을 선택하기로 했다.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후 학업에 매달린 끝에 2006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이의 딸 성아 씨도 어머니와 함께 하버드대학을 다녀 ‘하버드 최초의 모녀 재학생’으로 미국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어머니를 두고 “평생의 롤 모델”이라고 말하는 성아 씨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졸업 후 육군 장교로 복무 중이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성아 씨는 이후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탁월한 성적을 거뒀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에는 전미에서 1백41명에게만 수여하는 미국 대통령상을 받기도 할 정도로 수재이다. 서진규 박사는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딸의 모든 것에 일일이 관여하기보다는 아이의 삶에 대한 큰 계획만 그리려고 했다. 큰 틀의 그림 속에서 아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 성장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뿌린 희망이 다시 돌아오더라
평생을 도전하며 살아온 그이지만 하버드대학교에서의 박사과정은 그야말로 녹록지 않았다.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포기하고픈 마음과 싸워야만 했다.
“논문자료를 연구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논문을 쓰면서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피로도 많이 느꼈죠. C형 간염 보균자인데 그것이 완전히 악성화되면서 간암 초기 단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간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간이 안 좋으면 가장 힘든 일이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에요. 컴퓨터 앞에서 논문 연구를 하고 있다 보면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도대체 앉아 있을 힘이 없었죠. 그럴 때마다 ‘정말 한계에 온 건가? 이대로 진짜 간암이 돼서 몇 달 후에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이 정도 했으면 나도 할 만큼 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든 적도 많았고요.”
박사과정에서 사투를 벌이면서도 그이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이를 ‘희망의 증거’라고 부르며, 그이의 삶을 보고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노라고 쏟아져오는 편지들을 볼 때면 ‘내가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지’라는 의지가 절로 솟았다.
“제가 쓴 책을 보고 자살하려던 분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도 다시 한 번 살아볼 겁니다’라고 편지를 보내오니 얼마나 마음이 벅차겠어요. 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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