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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 마음 어루만지는 ‘마천동 슈바이처’ 서대원 원장의 Beautiful Life
외국인 노동자 마음 어루만지는 ‘마천동 슈바이처’ 서대원 원장의 Beautiful Life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10.0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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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봉사를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카르페 디엠(오늘을 특별하게 살라)’을 “외치며 즐겁게 하고 있죠”

저 멀리서 누군가 서대원 원장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든다. 서 원장이 바로 알아채지 못하자 더욱 힘껏 손을 흔들어댄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 두니 한 사람이 보였다. 얼마 전 자신에게 치료 받았던 외국인 노동자였다. 외국인 노동자는 고마움의 표시로 고국에서 가져온 보드카 한 병을 선물했다. 입맛에 맞지 않아 마시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몇 십만원짜리 양주를 선물 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다.
서대원 원장이 운영하는 내과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진료비가 1천원이다. 원래는 무료였는데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아 얼마 전부터 1천원을 받고 있다. 이곳은 외국인 노동자뿐 아니라 홀로 지내는 노인 등을 위해서도 파격적으로 저렴하게 진료해준다. 그래서인지 단골도 많다. 이렇게 해서 병원이 운영될까 싶지만 의외로 잘된다고 한다.
‘마천동 슈바이처’로 불리는 서대원 원장은 외국인 노동자와 노인들에게 의사이자 친구이다.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는 아들 같은 역할도 한다.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소망의 집과 서울 송파구에 있는 청암요양원은 그와 10년 이상 연을 맺고 있는 곳이다. 그가 봉사를 시작하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외국인 노동자 병원이 된 사연
“레지던트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어요. 레지던트나 전문의들 사이에서는 병원 당직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는데, 전 그걸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요. 당직을 서는 병원에서 소망의 집으로 무료 진료를 가게 됐어요. 소망의 집은 무의탁 장애 아동들을 돌보는 곳이죠. 제 상황이 어렵다 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운 사람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도와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재능 기부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어요.”
소망의 집에서 만난 아이들의 깊은 눈동자는 그의 마음을 울렸다. 자신처럼 어려운 상황에 있는 아이들을 보자 힘을 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의사라는 재능을 기부하며 이들과 함께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레지던트 시절을 끝내고 그는 작은 병원을 인수해 개원했다. 당시는 의약 분업으로 의약계가 떠들썩하던 상황이었다. 그가 노인요양시설인 청암요양원에 가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2000년 7월에 의약 분업이 있었는데 그때 의사들이 파업하면서 청암요양원의 상근의사 자리가 공석이 됐어요.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고혈압, 당뇨병 등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했죠. 요양원은 사람을 구하다 못 구해서 송파구 의사회에 공문을 넣었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만 진료를 보면 되는 촉탁의를 구했는데도 사람을 못 구했죠. 제가 그해 9월에 개원했는데 요양원에 의사가 없다 보니 할머니들이 밖에 나와 진료를 보게 되잖아요. 저에게 진료를 받은 어르신께서 제 이야기를 요양원에 하셨고, 촉탁의를 맡아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죠.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환자들도 많은 편이 아니어서 흔쾌히 승낙했어요.”
그는 할머니들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나눴다. 일주일에 두세 번만 가도 괜찮았지만, 그는 의사가 회진을 돌듯 출근하기 전 매일같이 요양원을 방문했다. 지금은 요양원이 공사 중이라 잠시 중단한 상태지만 10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보살폈다.
요양원이 공사 중이라고 해서 그가 의료봉사를 멈추고 있는 건 아니다. 할머니들 외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외국인 노동자들.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그들은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걱정돼서, 비싼 진료비가 부담스러워 병원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월급도 적을뿐더러 그 돈을 모아 고국으로 보내는 그들로서는 병원비가 아까울 수밖에 없다.
“추운 겨울에 날씨에 비해 옷을 얇게 입은 스리랑카 사람이 진료실로 들어오는 거예요. 더운 지방에 살다가 한국에 와서 얇은 옷으로 겨울을 나려다 독감에 걸린 거죠. 열이 펄펄 나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그 친구에게 돈을 받을 수 없더군요. 간호사에게 말해서 돈을 받지 말고 보냈는데, 다음주에 그 친구가 다른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온 거예요. 그렇게 계속 봐주다 보니 환자가 늘어났죠. 그때 외국인 노동자들의 의료 실태를 알게 됐어요. 병원을 찾은 외국인 노동자의 대부분이 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악화돼 있었거든요.”
소문이 나면서 그의 병원은 ‘외국인 노동자 병원’이라는 별명까지 생겨났다. 병원에 등록된 외국인 노동자만도 700여 명. 그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에요.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조선족 등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은 3D 직종이 많아요. 한국 사람들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죠.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분명 우리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렇게 박해해서는 안 돼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의료 서비스가 좀 더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봉사정신
그의 집은 대대로 의사 집안이다. 큰아버지도 의사였고 외할아버지도 치과의사였다. 어려서부터 흰 가운을 입고 사람을 진료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그가 의사가 되기로 한 건 집안 분위기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식이 있기 두 달 전 우연히 한 아이를 보게 되었어요. 그 아이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라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었죠. 그리고 입학식을 하던 날 같은 반에 그 아이가 있는 거예요. 반가운 마음이 들어 전에 본 적이 있다고 먼저 다가가 아는 체를 했죠. 입학식이 끝나고 반으로 올라가려는데 친구가 멈칫 하더군요. 대개 고등학교는 3학년이 1층, 2학년이 2층, 1학년이 3층이잖아요. 이 친구가 거기까지 올라가려면 무척 힘이 들 것 같았죠. 친구에게 ‘업어줄까?’ 그랬더니 선뜻 그러라고 하더군요. 그걸 계기로 친해지게 되고, 선생님의 배려로 그 친구와 3년 내내 같은 반으로 지냈죠. 그러면서 생각했던 게 ‘의사가 되면 약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거였어요. ‘소아마비 약을 잘 만들면 이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 생각들이 모여 의대에 지원하게 된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이웃에게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보여온 그. 하루 24시간을 환자들과 보내다 보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의 아내는 주말까지 반납한 채 의료봉사를 다니는 남편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한 물음에 그는 빙그레 미소만 짓는다. “처음부터 이런(?) 줄 알고 결혼해서 담담하다”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다.
“2003년에 아내를 처음 만났어요. 세 번째 만난 날 다짜고짜 아내에게 ‘비위가 좋냐’고 물었죠. 나쁘지 않다고 그러길래 그러면 어디에 한번 가자고 했어요.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고 소망의 집으로 데려갔죠. 여기저기 기저귀도 갈아줘야 하고 힘들 법도 한데 그런 내색 없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에서 ‘이 여자구나’ 싶었죠. 아내 역시 봉사하는 제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다음 해 결혼했어요.”
지금은 육아문제로 일을 하지 않지만 아이를 낳기 전에 아내는 간호사로 일했다. 덕분에 그가 의료봉사를 갈 때마다 함께 가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이해심이 많고 선한 마음을 가진 여자”라며 아내를 소개하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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