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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남편과 함께한 중국 유학생활 1년 아나운서 고민정‘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노래하다’
시인 남편과 함께한 중국 유학생활 1년 아나운서 고민정‘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노래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11.1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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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고민정 아나운서를 보면 떠오르는 말이다. 구름이 끼지 않은 밝은 햇살 같다는 뜻이기도 하고, 세상의 탁한 것이 섞이지 않은 깨끗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짧지만은 않았던 1년간의 중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더욱 그러한 느낌이다. 눈빛이 더 담백해지고 평화로워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녀 스스로도 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예전에는 불평하던 일들도 이젠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희망과 절망을 바라보는, 또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과 마음가짐이 좀 더 깊고 넓어진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우게 해준 중국 여행은 끝이 났지만 제 마음속 여행만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예요.”

채우고 싶어서가 아닌, 비우고 싶어서 떠난 여행
‘무한지대 큐’를 진행하며 주목받는 아나운서로 자리잡아가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과 함께 불현듯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큰 프로그램을 맡아 한창 일하고 있는 와중에 왜 그런 무모한 결정을 하느냐”고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그 즈음 본인 스스로는 참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제 갓 피어오르는 후배들 틈에서 방송도 일선에서 많이 물러나게 되고, 결혼하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부담감 또한 그녀를 지치게 했다.
“언젠가 한번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학을 떠날 당시, 물론 갖고 있는 것이 나름 크고 충분했지만 그럴 때일수록 지금 잠시 멈추지 않으면 앞으로 더 큰 발전은 없을 것만 같았죠. 단순한 휴식 개념이라기보다 나를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 공부를 통해 지식을 쌓는 시간, 세상에 대해 더 넓은 시각을 키우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결정한 일이었어요. 버리고 떠나지만 돌아올 땐 더 많이 커져서 올 것을 다짐하면서 말이죠. 중어중문학과 선후배 사이이기도 한 우리 부부의 머릿속에 떠오른 곳이 마침 중국이었고요.”
객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중국 생활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 1년을 “꿈만 같았던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아파트가 아닌 기숙사 생활을 하며 1인용 침대 두 개, 책상 두 개, 작은 냉장고 하나가 전부였고 화장실에서 채소를 씻어 요리를 해먹어야 할 정도로 좁은 방 한 칸에서 처음에는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남편이 툭툭 던지는 한마디는 그녀의 불평을 즐거움과 감사로 바꾸어놓았다.
“결혼 전에 남편이 옥탑방에서 자취를 했었어요. 그때는 한창 연애하고 있을 때라 ‘오빠, 나중에 결혼하고 우리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 오빠랑 있으면 어디든 다 좋을 것 같아’라고 얘기했죠.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다 보니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후로는 소소한 것에도 만족을 느끼며 정말로 즐겁게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었죠. 사실 떠나기 전에는 우리가 살던 23평 아파트도 좁게만 느껴졌는데 돌아와서 보니 이렇게 크고 넓은 집에 살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중국 칭다오에 머물렀던 고민정·조기영 부부는 공부하면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생각보다 중국에서 한국어 인지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그녀는 아나운서로서 사명감을 갖고 한국어뿐 아니라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도 노력했다. 처음에는 낯선 외국인 강사에게 거리감을 두던 아이들도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고, 명절 때면 시골집에서 채소며 과일이며 무게가 나가는 농산물을 바리바리 들고 찾아와 선물할 정도로 그녀를 따랐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아이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잠깐이었지만 중국에서 의료봉사를 한 시간도 이들 부부에게는 잊지 못할 보람이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우리나라의 적십자와 같은 ‘레드 크로스’라는 의료봉사단체에서 각자의 재능과 방법으로 이웃을 도왔다.
“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을 음성으로 녹음하는 낭독 봉사, 어르신들을 접수처나 진료처로 안내하는 일을 맡아서 했죠. 이렇게 작게나마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치 있고 귀하던지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싶어 다양한 경로를 찾고 있는 중이에요.”

시인의 아내, 너무도 가슴 벅찬 이름
“늦은 계절에 나온 잠자리처럼 청춘은 하루하루 찬란하게 허물어지고 빈 자루로 거리를 떠돌던 내 영혼 하나 세워둘 곳 없던 도시에 가난한 시인의 옆자리에서 기어이 짙푸른 느티나무가 되었던 당신… 내 눈빛이 사랑이라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의 마음속으로 숨어버린 그날 이후, 내 모든 소망이었던 그 한마디를 씁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조기영 시인이 고민정에게 프로포즈하기 위해 썼던 오직 그녀만을 위한 시의 한 구절이다. ‘청혼’ 시를 들으며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던 그 순간을 앞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현실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명예를 인정받는 아나운서와 세속적인 것을 경계하는 예술인과의 만남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다.
“대학 때 같은 과 선배로 남편을 지켜봤을 때도, 처음 교제를 시작할 때도 그 사람의 성품을 보며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아나운서가 됐다고 ‘고민정’이라는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제 마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경제적 능력이나 학벌, 집안 등 그런 세상적인 잣대를 기준 삼아 저를 맞추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몇 십 년을 따로 살아온 남녀가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늘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으며, 현실적인 문제 역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 부부에게도 물론 위기며 갈등이 있었다. 특히 시인인 남편은 세속적인 욕심보다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더욱 중요시했다. 그녀는 그런 올곧은 남편과 가정 경제를 책임지며 겪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숨막힘을 느끼고 힘들 때도 있었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하지만 그런 괴리에 빠질 때마다 친정어머니의 조언은 큰 역할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돈에 얽매여 살지 마라’라고 말씀해주었어요. 돈은 쓰고 나누라고 있는 것이라고요. 제가 만약 100만원을 벌면 그 100만원 전부를 자신을 위해 쓰기보다는 친구들한테 맛있는 밥도 사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살라고 하셨죠. 그게 정말 그 100만원을 가장 행복하게 쓸 수 있는 길이라고요.”
올해 결혼 6년 차를 맞은 부부. 그녀는 결혼생활이란 단순한 일심동체가 되기보다 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철길 같은 관계가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삶을 명확하게 가지며 그 삶을 존중해주되 절대 떨어지지 않고, 갈라지지 않고 한곳을 향하는 것.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녀의 말처럼 이들 부부 역시 서로의 삶을 누구보다 배려해준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은 우리가 꾸리게 될 가정의 생계를 위해 시 쓰는 것을 그만두고 회사에 취직하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어요. 필사적으로 그를 말린 게 바로 저였죠. 저는 아나운서라는 저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남편이 저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면 제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았어요.”
여느 작가들처럼 밤에 주로 작업하는 남편과 출퇴근이 명확한 그녀의 생활패턴이 맞지 않아 불편한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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