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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과 자유를 넘나드는 이슈 메이커 의외로 예의바른 낸시 랭과 ‘부담 없이 소통하기’
도발과 자유를 넘나드는 이슈 메이커 의외로 예의바른 낸시 랭과 ‘부담 없이 소통하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11.11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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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촬영 중 돌발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개성 있는 퍼포먼스, 파격적이며 일탈적인 행동과 발언으로 여러 논쟁의 중심에 섰던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한 후 기자 역시 ‘낸시 랭’이라는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면서도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한 시간가량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후, 입구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포스가 느껴지면서 핫핑크 미니원피스 차림의 낸시 랭이 눈에 들어왔다. 스케줄을 마치고 곧바로 출발했지만 차가 너무 막혀 본의 아니게 늦었다고 특유의 애교로 연신 미안함을 표현하는 그녀. 그러고는 가방에서 포장도 뜯지 않은 새 화장품을 꺼내며 미안해서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촬영 내내 방글방글 웃으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던 그녀를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이 사람, 정말 진국이다. 너무도 예의바르고 사랑스러우며 생각 깊은 ‘진짜 낸시 랭’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품과 분리되지 않는 아티스트적인 삶
“사실 처음부터 팝아트를 한 것은 아니에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주로 회화작업을 했으니까요. 그렇게 두 번 개인전을 하고 난 후, 어느 날 문득 내가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현대 미술 영역에는 제가 하는 페인팅 회화 말고도 너무도 다양한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때도 그 즈음이었죠.”
그렇다고 막상 뭘 해야 할지 명확하게 알았던 건 아니지만 일단 다른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2002년 비디오아트나 설치미술이 한창 붐을 이루고 있던 때 그녀 역시 관심을 두었지만 그러한 작업은 장비도 어마어마하고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크게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몸을 매체로 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생각해냈다.
낸시 랭은 퍼포먼스를 그다지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욕망을 품는 것, 패션과 란제리를 첫 주제로 삼았다. 그 무렵, 베니스 비엔날레를 알게 됐다. 그때만 해도 초대받지 않은 아마추어에 불과했지만 일단 그녀는 베니스행을 결심했고, 어느새 작품 준비도 끝냈다. 하지만 문제는 비행기 값.
“엄마가 많이 아프셔서 하던 일도 접고 정말 돈이 없을 때였어요. 비행기 값은커녕 학비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딱 하필 그때 저의 터부 요기니 100호짜리를 500만원에 사겠다는 분이 나타난 거예요. 그분이 저의 첫 번째 컬렉터가 된 셈이죠. 그 덕에 저는 진짜 베니스로 날아갈 수 있었어요.”
아직도 그때의 감격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그녀의 얼굴이 상기됐다. 그때 베니스에서 선보인 것은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이라는 콘셉트의 터부 요기니 퍼포먼스. 란제리 차림으로 길거리에서 벌인 이 퍼포먼스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지만 박수도 많이 받았다. 이후 그녀에게 베니스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사하면서도 성스러운 추억이 있는 곳이 됐다. 
이를 계기로 전 세계에서 ‘낸시 랭스러운’ 퍼포먼스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한국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됐다. 하지만 잦은 방송 출연으로 예술인이냐 연예인이냐 하는 항간의 비판을 들었고, 낸시 랭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국내 최초 연예인형 팝 아티스트”.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님이 비디오아트를 창시했듯이 저 낸시 랭은 셀러브리티 아트를 창조하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핫한 곳인 연예계와 상위층이 누리는 고급문화로 꼽히는 미술계를 융합해 블루오션을 꿈꾸는 거죠. 두 파워가 합쳐지면 정말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을 TV와 패션, 기업 등 다양한 분야와 조합해가며 대중과 소통하는 팝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아직도 색안경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녀의 솔직하고 순수한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낸시 랭은 그조차도 모두 감사하다고 말한다. 칭찬이든 욕이든 예술가로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 자체가 정말로 행복한 일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고 무서운 건 무관심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욕망과 철학과 신념을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길 바라죠. 그들의 피드백을 듣고 싶어하는 거예요. 또한 그런 피드백으로 스스로도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이고요. 다만 먼 훗날엔
‘아, 정말 낸시 랭은 자신의 꿈과 뜻을 키우기 위해 참 치열하게도 노력해온 아티스트구나’라고 기억해주도록 더 발전해야겠죠.”

적막 걷어내고 다시 오르는 제2의 인생
부모는 낸시 랭이 어린 시절 미국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 탐 존스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 베트남, 방콕 등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쇼를 하는 일종의 매니지먼트를 운영했던 것.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순회공연이야말로 최고의 쇼로 꼽혔고, 수금이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현금을 벌 수 있었다. 자연스레 그녀 역시 최고의 환경에서 모든 혜택을 누리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재벌 2세였던 구준표의 삶을 살았죠(웃음). 경제적인 면에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지만 부모님이 사업으로 워낙 바쁘다 보니까 저는 할머니와 가정교사의 손길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과의 추억이 많지 않아 그게 조금 아쉽기도 해요.”
어쩌면 그래서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문학이든 그림이든 무용이든 예술을 배우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뭐든지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성향도 이어 받았다. 덕분에 낸시 랭은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학급 임원을 도맡아 할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났고 성적도 우수했다.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다닐 때도 놀기도 잘 놀았지만 늘 A학점을 유지할 정도로 야무졌다.
“대학원을 진학하던 시기에 집안 상황이 많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도피처로 더 작업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가정 경제를 거의 책임지고 있던 어머니가 많이 아파서 가세는 기울어진 지 오래였고,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정말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진 느낌이었죠.”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지난해 2월, 결국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한동안 그녀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주변에서 누구라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한 뼘 더 자란 그녀는 이제 좀 더 성숙하고 담담한 자세로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보며 인사를 건네다. 그러고는 오늘도 자랑스러운 딸이 되자고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힘든 일을 겪으면서 저 자신도 많이 성숙해진 느낌이에요.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 같다고 할까요. 천국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 부모님에게 박수 받을 만한 딸이 될 거예요. 저 ‘낸시 랭’ 그 자체만으로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쳐 서울을 런던이나 파리, 뉴욕 같은 현대 미술의 메카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마음먹은 것은 꼭 이루는 저니까 기대해주셔도 좋아요(웃음).”
올해 말, 앨범 발매를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와 음악을 조합하는 또 다른 ‘낸시 랭의 예술’을 준비 중이라는 진취적인 아티스트. 이제는 대화가 잘 통하는 일명 ‘뇌가 잘생긴 남자’를 만나 사랑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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