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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스케이팅의 살아있는 전설 이규혁의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피드 스케이팅의 살아있는 전설 이규혁의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3.09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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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빙상의 캡틴
‘비운의 스타’. 그를 지칭하는 별명 중 하나다. 많은 기록을 갖고 있는, 명실공히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임이 분명하지만 유독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던 탓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중학교 1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열여섯 살의 나이에 올림픽에 참가, 그후 지금껏 많은 세계대회와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였기에 매번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당연히 메달 가능성이 점쳐지곤 했다. 그만큼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20년 가까이 대표팀 생활을 하며 올림픽에만 다섯 번 출전했으나 늘 노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는 발목부상과 함께 교체한 스케이트가 맞지 않아 힘든 시기를 겪었고,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는 아깝게 4위를 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올림픽을 바라보고 연습해요. 저 역시 올림픽을 대비해 항상 열심히 연습했고, 자신도 있었지만 결과는 늘 아쉬움만 안겨주었죠. 그래서 그런지 올림픽 이후에는 슬럼프가 왔던 것 같아요. 저 자신에게는 실망하고, 저를 응원해주는 팬들에 대해서는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죠.”
그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지난해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노메달로 마치고 난 후에는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보였을 정도니 그 아쉬움과 답답함으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짐작이 된다. 또한 그때는 한참 후배인 모태범, 이승훈 선수가 금메달을 따내는 등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상대적인 박탈감과 같은 허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선수로서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위기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너무 비교를 받으니까 그건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인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같은 종목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메달을 따는 것은 기쁜 일임이 분명해요. 아끼는 후배들 덕에 우리나라에서 스피드스케이팅이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도 뿌듯하고요. 무엇보다 많은 국민들이 질책보다는 격려를 보내주셔서 슬럼프를 훌훌 떨칠 수 있었죠.”
실제로 그에게는 “20년 가까이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보여준 성적과 모범적인 태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값진 금메달”이라는 많은 국민들의 격려가 쏟아졌다. 올림픽을 마친 후에는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 이규혁에게 명예 금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금메달을 수여 받은 이규혁은 메달을 손으로 들어보고 깨물어보기도 하는 등 벅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결과가 좋지 않아도 변함없이 저를 믿어주고 격려해주는 많은 분들 덕분에 지금까지 자신 있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전 정말로 복이 많고 행복한 선수예요(웃음).”

스피드스케이팅은 운명, 은퇴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였던 이익환(65),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이자 현재 전국스케이팅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인숙(55) 씨의 장남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빙상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생각이 자리잡히기 전부터 이미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어머니가 저를 가지셨을 때도 스케이트를 타셨다고 하더라고요. 저와 동생이 태어나고 난 후에는 코치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전 동생과 함께 한쪽 구석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놀았죠.”
그의 동생은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이규현이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 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1998년, 2002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로 뛸 때는 각각 24위, 28위를 기록하는 등 동양인으로는 우수한 결과를 얻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가족은 2대에 걸쳐 모두가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전통(?) 빙상 가족인 셈이다. 같은 운동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믿음이 누구보다 돈독하다.
“형제끼리 같은 종목의 운동을 하면 싸우게 된다고, 어머니가 각각 다른 것을 하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결국 저는 아버지와 같은 스피드스케이팅, 동생은 어머니와 같은 피겨스케이팅을 하게 된 거죠. 워낙 어렸을 때부터 선수생활을 해서인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어요. 다만 경기 후에는 가족의 입장이 아닌 선배의 입장으로 눈에 보이는 단점을 지적해주고, 어떤 것을 더 연습하라고 격려해주시기는 하죠. 하지만 대부분은 각자 훈련을 하거나 연습이 있으면 뭐 6개월이 넘도록 못 보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대신 한번 모이면 이야기꽃을 피우는 편이죠. 다만 그때는 스케이트 이야기는 안 해요. 쉴 때는 무조건 편안하고 즐겁게 휴식을 취해야 그다음 훈련에 들어갔을 때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으니까요.”
올해로 그는 서른네 살이 되었다. 운동선수로는 은퇴를 고려해야 할 나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네 번째 메달 획득에 실패한 지난 2006년 토리노 올림픽을 마치고 심각하게 은퇴를 고려했다. 올림픽 네 번 출전은 결코 적은 횟수가 아닌데 자신이 한 번도 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것이 한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서 포기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다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또다시 좋은 기록을 세우며 한 번 더 올림픽에 도전할 각오를 다지게 됐다.
“항상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올림픽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올림픽 뒤에 찾아오는 슬럼프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여러 번이었고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저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지고 한계에 부딪혔다는 생각이 든 올림픽 직후의 경기에서는 성적이 잘 나오더라고요. 마치 누군가 일부러 저에게 계속 올림픽에 도전하라고 계기를 마련해주고, 각오를 다져주는 것처럼요. 이제는 올림픽이라는 대회에 맞춰서 운동하고 싶지는 않아요. 눈앞에 있는 대회를 차근차근 준비하며 그저 열심히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죠.”
메달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선수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알맞은 때에 자연스럽게 현역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것. 그때까지는 아직 너무 멀리 내다보고 싶지는 않다.

알고 보니 드라마 마니아, 감수성 깊은 부드러운 남자
경기장 안에서는 누구보다 냉철하고 매서운 눈빛을 가진, 대표팀 맏형이자 캡틴으로서 과묵하고 진지한 모습의 그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최신 유머를 구사하는 유머리스트이자 로맨티스트다. 드라마를 열정적으로 챙겨 보는 인간적인(?) 면모까지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
“‘시크릿 가든’ 봤어요? 정말 너무 재미있던데. 사실 경기 때문에 외국에 자주 나가니까 혼자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아요. 그때는 드라마만 한 친구가 없죠(웃음). 이번 세계스프린트대회는
‘시크릿 가든’과 함께했습니다. 저는 액션이나 스릴러보다는 로맨틱하고 감성적인 멜로물이 더 좋더라고요(웃음).”
‘시크릿 가든’에서 이상형에 가까운 여배우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멋쩍은 듯 “현빈 씨?”라고 말하며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이기도 한다. 운동선수로는 조금 늦은, 결혼 적령기에 들어서다 보니 이제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싶을 법도 한데 그는 아직 결혼에 대한 절실함은 없단다.
“아직은 혼자 드라마를 보거나 쇼핑하는 게 좋더라고요(웃음). 그렇다고 독신주의자는 아니에요(웃음). 언젠가는 여자친구도 만나고, 결혼도 해야겠죠. 여자친구는 저와 말이 잘 통하고 취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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