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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9’ 민경욱 앵커가 털어놓는 뉴스 밖 이야기
KBS ‘뉴스9’ 민경욱 앵커가 털어놓는 뉴스 밖 이야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3.10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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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사건,
사고현장을 지킨 경험이
오늘을 있게 해… 정확하고 공정한 뉴스 전하고 싶다”

 


“KBS에 들어와서 ‘무언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적이 딱 세 번 있어요. 늘 시험 보기 전 목욕탕에서 했는데 첫 번째는 7시 뉴스 앵커 오디션 때, 두 번째는 워싱턴 특파원 시험 때, 그리고 세 번째가
9시 뉴스 앵커 오디션을 준비하면서였어요.”
9시 뉴스 진행은 아나운서와 기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자리다. 온 국민이 주목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그 이름만으로도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0년간 준비해온 바람을 일궈낸 민경욱 앵커. 매일 밤 9시 숨 가쁘게 돌아가는 뉴스 현장을 지키고 있는 그는 사회부, 정치부 기자를 거치며 보도 부문 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을 뿐 아니라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생방송 ‘열린 토론’과 최근까지 라디오 시사토론인 ‘심야토론’을 진행했던 그는 9시 뉴스 진행에 앞서 “심각한 뉴스를 전할 때의 진지한 표정이 화난 것으로 간혹 오해받기도 하지만 지금의 자리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다”고 말했다.

“저 앵커 해도 별 문제없는 사람입니다”
오랜 기간 방송생활을 한 사람이더라도 9시 메인 뉴스를 진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정통 뉴스를 추구하는 KBS 9시 뉴스의 앵커 자리는 상당한 부담과 책임이 뒤따르는 만큼 누구나 이 자리에 서면 떨기 마련이다. 하지만 민경욱 앵커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오히려 웃음을 지어 보인다.
“파트너인 조수빈 아나운서 말로는 ‘뉴스9’가 다른 뉴스와 달라서 긴장을 많이 한다더군요. 첫 뉴스를 진행한 곳이 광화문이었는데 그날은 방송국 밖이라 챙길 것이 많아 떨릴 겨를이 없었어요. 준비해놓은 것을 전달한다는 차원으로 본다면 그동안 해온 토론보다는 훨씬 쉽게 느껴지기도 했죠.”
취재를 비롯해 특파원, 토론 진행자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온 지난 20년은 그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양분이 되었다. 어찌 보면 준비된 인재가 빛을 발하는 시간이 조금 늦게 찾아온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보도부 기자로 활동할 때는 정치, 사회가 주 분야였지만 토론을 진행하면서 경제, 문화, 과학 할 것 없이 다양한 소양을 쌓을 수 있었죠. 예전에는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기 위해 애썼다면 이제는 정말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예요. 스스로 준비됐다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맡겨도 큰 문제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맡은 일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늘 충만한 그지만 9시 뉴스 앵커만큼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자리였다. 이미 여러 번 오디션에서 미끄러진 터라 이번에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던 것.
“출장차 뉴욕에 나가 있을 때 ‘뉴스9’ 앵커 오디션 소식을 들었어요. 외국에 있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회사에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오디션 한번 보라고요. 한국에 도착하고 다음날 면접을 봤는데 힘들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최종 두 명을 뽑는 자리까지 올라 합격했어요.”
단순히 실력뿐 아니라 운도 따라줘야 하는 자리이기에 그의 합격소식은 가족에게도 뜻밖이었다. 아내는 “당신이야말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아내로부터 그런 칭찬을 받는 것은 남편에게 있어 훈장 같은 것”이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자생활 20년, 치열하고 또 치열했다
1991년 KBS에 발을 내딛은 민경욱 앵커는 올해로 입사 20년을 맞았다.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일을 스무 해 넘게 해오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기에 그의 지난 행로는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기념패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의도치 않게 올해가 자축의 해가 된 것 같다”며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스스로도 축하할 만한 해가 된 셈이네요.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참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아요. 대학원을 다니며 석사논문을 쓰는 시기에는 공보처에서 뽑는 해외공보관 외신부 전문위원에 합격해 한국 관련 신문기사를 번역하는 일을 했어요. 거기에 연합통신에서 외신부 촉탁위원 일도 같이 했죠. 당시 집이 인천이었는데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 여관에서 하루에 네 시간도 채 못 자면서 일하곤 했어요. 늘 피곤하기 일쑤였지만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제가 되고 싶었던 건 기자였어요.”
행정학을 전공한 그지만 영자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그 매력에 푹 빠졌다. 이후 방송국 시험을 계속 치르면서도 최종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차에 그는 당시 나이제한이 걸려 있던 마지막 해에 합격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입사 후 정치부, 기동취재부, 사회부를 지내온 시간은 고생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자생활에서 가장 큰 방점을 찍었던 때는 워싱턴 특파원 시절이었다. 흔히 특파원이라 하면 근사하고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만은 예외였다.
“워싱턴에 있는 동안 백악관 취재처럼 남들 눈에 멋있는 일도 했죠. 하지만 그건 일도 아니었어요. 제가 정말 일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느낀 것이 워싱턴에 있는 동안 겪은 많은 사건과 사고 때문이죠. 허리케인 카트리나부터 한인 부부가 휘말린 600억 바지소송, 하인즈 워드가 MVP를 받은 일, 조승희 씨 총기 난사 사건이 모두 제가 워싱턴에 있는 3년 동안 일어났어요. 게다가 황우석 박사 일로 화두에 올랐던 과학저널 ‘사이언스’,  ‘네이처’가 때마침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기도 했죠. 다른 사람이라면 일하는 기간 중에 한두 번 일어날까 하는 일들이 제가 있는 동안에는 끊이지 않고 일어났어요(웃음).”
당시 3년 내내 말진으로 일했기 때문에 모든 사건 현장에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그때의 경험이 훌륭한 자산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죽을 만큼 하기 싫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특히 조승희 사건 때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취재하는 것뿐 아니라 생존문제까지 염려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조승희 씨 총기 난사 사건 때는 소식만 전해 듣고 다섯 시간을 운전해서 현장으로 달려갔어요. 아무런 준비 없이 말이죠. 도착하니 4월인데 때 아닌 눈이 오더라고요. 속옷은커녕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함께 갔던 기자에게 독감까지 옮아서 기관지염에 시달리기도 했죠. 전 세계 외신들이 몰려 잠잘 숙소조차 구하지 못해 고생도 했지만 처음에 중국인인 줄 알았던 조승희 씨가 한국인인 것을 알게 되면서 어려운 마음을 안고 취재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동안 휴가조차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 휴가를 내도 사건이 생기면 다시 돌아와야 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행도 쉽게 갈 수 없을 정도였으니 함께 온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
“집사람이 산부인과 전문의인데 당시 한국에서는 3년간 장기 휴가를 낼 수 없어 저 때문에 퇴직하고 미국에 함께 온 거였어요. 아이들도 낯선 미국 학교를 다니며 적응하느라 고생했죠. 그래도 아내는 의료 관련 기관에서 공부도 하고 아이들은 영어실력도 많이 늘었으니 그리 손해 보는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생각조차 못했던 살림도 했고요(웃음). 무엇보다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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