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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한 ‘기적의 손’ 미 연방 하원의원 살린 한국계 미국인 의사 피터 리
세계가 주목한 ‘기적의 손’ 미 연방 하원의원 살린 한국계 미국인 의사 피터 리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5.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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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처음으로 그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은 지난 1월 말. 당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집중을 받던 터라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내용인즉 기퍼즈 의원을 살린 것이 자기만의 공이 아니라는 것. 이후 여러 차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강직하고 도전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그의 성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 미국으로 질문지를 보냈더니 그의 깊은 생각이 담긴 답신이 왔다. 인터뷰에 응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고 한 그였지만 세세하면서도 솔직한 문장만 보아도 자신의 일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과 국민들로부터 받은 박수갈채
미국 애리조나대학 메디컬센터(UMC)에서 외상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피터 리 박사. 총기 테러 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기퍼즈 연방 하원의원을 살려낸 수술을 책임졌던 그는 당시 오바마 대통령보다 더 자주 TV에 나오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제가 기퍼즈 의원의 생명을 구한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부각됐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외상수술 체제는 복잡할 뿐 아니라 긴급의료원, 여러 외과 전문의, 간호사까지 모두의 수고와 노력이 요구되죠. 그럼에도 많은 언론이 저에게 감사표시를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제가 맡은 일이 힘들고 많은 시간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단지 우리 팀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퍼즈 의원을 성공적으로 살린 이후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신년국정연설에 초청 받아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한없이 겸손한 모습이었다.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2만여 관중 앞으로 걸어갔을 때 이게 저를 위해 마련된 상황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어요. 그저 매일 하던 일을 했을 뿐인데,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고 감사할 따름이었죠. 아내와 아이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만 모두들 의아해하는 눈빛이었어요. 제가 감사하다고 느꼈던 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외상외과 분야의 중요성과 그것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알리는 기회가 됐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사람
한국에서 태어난 피터 리 박사는 여섯 살 무렵 외과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우간다로 떠났다. 동아프리카에서 두 형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고 이후로는 미국에서 생활했다.
“우간다에서 4년 정도 머물렀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배움의 기회가 더 많은 미국으로 가족 모두를 데리고 가셨죠. 그 당시 우간다 대통령이 모든 동양인들에게 자신의 나라를 떠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요. 레지던트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 뉴저지, 오하이오주의 영스타운으로 계속 옮겨 다녔어요. 나중에는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유니온타운이라는 작은 도시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죠.”
의술을 펼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일까. 청소년 시절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을 갖고 있었다. 이후 공학대학에 입학했지만 오래지 않아 그의 마음은 바뀌었다. 다른 직업보다 의사로 살아가는 것이 평생을 두고 봤을 때 자신에게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전과 성취감을 추구하는 제 성격과 수술하는 것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뒤에는 의과대학 학비를 지원 받기 위해 미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24년간 해군에서 근무하고 마흔다섯 살에 전역했죠. 현역으로 활동한 기간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파병되어 미군과 이라크 시민들을 상대로 수도 없이 많은 치료와 수술을 해왔어요.”
제대 이후 애리조나대학 외과 교수로 부임한 피터 리 박사는 현재 외상치료 관련 프로그램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그가 처음 애리조나대학 메디컬센터에 부임했을 당시 이곳의 외상분야는 열악한 상태였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군의관으로 일하며 터득한 그의 경험과 배움은 애리조나대학 메디컬센터를 외상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프로그램을 갖춘 곳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쟁터에서 터득한 경험들은 병원에서도 언제, 무엇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정확하게 적용하는 자산이 되고 있어요. 군 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간인 셈이죠.”
일반적으로 외과의사의 업무라 하면 수술만을 떠올리기가 쉽다. 하지만 외상 전문의 중에서도 베테랑에 속하는 피터 리 박사는 중환자 수술, 응급수술을 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의 몸을 차갑게해서 죽은 상태로 바꿨다가 다시 살리는 연구 등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
“제 직업은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최고의 직업입니다. 저는 매일 사람들을 가르치고, 매일 환자를 돌보며 치료합니다. 여기에 미국 전역과 세계를 다니며 강의하고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일들을 더하면 일하는 시간이 일주일 평균 100시간 정도가 되더라고요. 미국에서 이 정도로 일하는 것은 꽤 많이 일하는 편에 속하지만 저 스스로는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술과 연구로 생명을 살릴 때 가장 행복하다
피터 리 박사는 정말 힘든 상황에 놓인 생명을 살릴 때 의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상황, 도전적인 상황에 처할 때면 오히려 몸 속의 세포들이 흥분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외상전문의로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심각하게 화상을 입은 사람들까지도 도울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요. 특히 환자의 가족들이 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위로 받고 또 기뻐할 때 저 역시 기분이 좋습니다. 더 나아가 세계 곳곳에 있는 외상분야 의사들이 저의 연구 결과로 예전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수술할 수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제가 매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많지 않지만 제 연구를 기반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니까요.”
연구와 수술을 통해 환자를 살려내는 일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피터 리 박사. 하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렇듯이 그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 아쉬움과 미안함이 많다.
“출장이 가장 힘들어요.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은 너무 많은 출장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할 때가 많거든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문제가 요즘 매일같이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그는 레지던트 시절 중환자실의 베테랑 간호사인 에밀리를 만나 결혼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이클(16)을 낳았고 둘째 딸 애너(10)는 부부가 한국으로 가서 직접 입양한 아이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인지라 그는 스스로를 두고 좋은 남편도, 좋은 아버지도 아니라고 말한다. 허나 “아들과 딸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하고 싶은 방향으로 진로를 정할 수 있도록 늘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며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이야기하는 그는 자신의 일 못지않게 가족을 아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의사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관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의무와 훈련된 자세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가 하는 일이 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도울 수 있어서 좋습니다. 또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제가 가장 즐겨하고 잘하는 일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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