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2:20 (토)
 실시간뉴스
‘잉꼬부부’로 소문났는데 왜? 우리들병원 이상호 이사장·김수경 회장 부부 이혼 법정에 서다
‘잉꼬부부’로 소문났는데 왜? 우리들병원 이상호 이사장·김수경 회장 부부 이혼 법정에 서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6.17 0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사와 경영인을 넘어 시인이란 이름으로 예술적 관심이 남달랐던 두 사람의 파국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과거 부산의 작은 신경외과 병원에서 시작해 오늘날 우리들병원그룹으로 발전하기까지 이상호 이사장과 김수경 회장 부부의 팀워크는 세간에 화제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지난 2005년에는 결혼 30주년을 기념해 <우리는 함께 시간 속을 걸어가네>라는 제목의 공동 시집을 내며 잉꼬부부로 살아온 두 사람. 그러나 최근 격렬한 이혼 공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보도에 따르면 이혼을 먼저 요구한 쪽은 이 이사장이다. 이유인즉, “아내인 김 회장이 시어머니를 학대하고 의부증이 심해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 이와 함께 이 이사장은 혼인관계 파탄의 책임이 아내에게 있다며 위자료까지 청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이혼 소송이 제기된 것은 이미 지난해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갈등의 빌미가 된 “이 이사장의 어머니를 학대했다”는 부분에 대해서 김 회장은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김 회장은 “시어머니를 직접 모시지도 않았는데 학대는 사실 무근”이라며 의부증 부분에 대해서도 “남편이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인들의 말 또한 각자의 입장만큼이나 엇갈리는 상황이다. 그중에는 “이 이사장이 실제로 김 회장 몰래 젊은 여성과 교제를 해왔다”는 주장도 있는가 하면 “김 회장이 이 이사장을 아랫사람 다루듯하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주장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앞서 언론 보도에서 우리들병원 관계자는 “이미 2∼3년 전부터 경영문제 등의 이견차로 심각하게 다투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 밝혀 부부의 갈등이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혼 소송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지난 4월 19일 세상을 떠난 이 이사장 모친의 빈소에는 며느리인 김 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법정에까지 갈 정도로 부부간의 갈등이 이미 봉합될 시기를 놓쳐버린 상황에서 김 회장 역시 소송 초기 “이혼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지금은 재산 분할 등에 대한 협의를 마무리할 정도로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 의아한 것은 부부에게는 부채가 많아 나눌 수 있는 재산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 한때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고 지금도 척추분야의 최고로 손꼽히며 많은 환자들이 드나들고 있는 우리들병원을 경영해온 부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예술을 사랑했던 부부
36년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날 부부가 이뤄놓은 성과들을 돌이켜보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들병원이 주목 받아온 만큼 부부의 러브스토리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부부는 문학 동아리에서 만나 지난 1975년 결혼을 했다. 7년의 연애 끝에 결혼할 당시 이 이사장은 군대를 막 제대한 의대생이었고 김 회장은 영문과를 나와 잘나가는 영어교사로 유명했다고 한다. 결혼 당시부터 경제적인 부분은 김 회장의 힘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1982년 남편을 위해 친정의 도움을 받아 부산에 이상호 신경외과를 열었던 김 회장. 그러나 지난날 한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의사의 아내로서 뒷바라지를 하는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결국 부부는 김 회장의 제안으로 신경외과에서 척추 전문병원으로 진료과목을 바꾸게 됐다. 김 회장으로서는 더 이상 새벽에 머리에 부상을 입은 교통사고 환자를 받지 않아도 돼 그제야 원하는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다.
천생 학자이자 의사인 남편 이상호 이사장과 남다른 경영능력을 지닌 아내 김 회장은 문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연결돼 있었다.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할 정도로 문학적 조예가 깊었던 김 회장은 1990년 소설 <자유종>을 포함해 몇 권의 시집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88년 홀로 서울에 올라와 출판사를 경영할 정도로 일찌감치 남다른 수완을 보였다. 이 이사장 역시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몇 편의 시집을 펴낸 바 있을 만큼 아내에 버금가는 문학 사랑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혼 30주년을 기념한 시집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을 담은 시를 발표하기도 했던 두 사람이기에 지금의 상황은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지난 정권과의 인연으로 고초도 겪어
부산에서 척추 전문병원으로 유명세를 높인 우리들병원은 김 회장이 남편을 설득해 서울에서 병원을 옮기기로 하면서부터 급속도의 발전을 이뤄냈다. 서울 강남으로 병원을 옮긴 첫날 2천500명이 넘는 환자가 몰렸을 정도. 이후 전국 각지에 분원을 내는 한편 의약품 제조와 레저, 영화, 출판분야에까지 경영 영역을 확장하며 우리들병원그룹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급성장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이사장이 최소침습적 척추수술법이라는 혁신적인 의료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김 회장은 남다른 경영 수완을 발휘한 결과였다.
이들 부부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연 역시 유명하다. 1990년대 개발한 이 이사장의 최소침습적 척추수술법이 보건복지부로부터 특수 진료로 인정받지 못해 건강보험 수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을 때, 김 회장이 정부를 상대로 낸 반환 청구 소송을 맡은 변호사가 노 전 대통령이었던 것.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저렴한 선임료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냈고 부부는 고마움에 노 전 대통령을 병원 고문 변호사로 위촉했다고 알려진다. 그러한 인연은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까지 이어졌고 노 전 대통령 본인이 수술을 받기도 해 우리들병원의 유명세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그러한 인연은 훗날 정권이 바뀐 이후 적잖은 고초를 겪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즉 전 정권의 비호를 받아 단기간에 급성장했다는 의혹을 받은 것. 결국 고강도의 세무조사는 검찰 수사까지 이어졌고 김 회장은 세금 포탈 등의 혐의로 지난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게 됐다.
두 사람이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데는 이 시기에 불거진 갈등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언론에 따르면 김 회장이 검찰 수사와 재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편인 이 이사장이 관심을 쏟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오랜 세월 깊은 사랑을 유지해온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는 데는 그외에도 당사자들 외에 세상이 알 수 없는 갈등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이어지고 있다. 두 사람의 법적 공방이 원만한 합의를 통해 해결되기를, 그리고 두 사람의 합작품인 우리들병원이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